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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에 대해

본문

질문

지금까지 먹고사는 데 급급해 그동안 인생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살아온 게 참 안타깝습니다. 퇴임하고 여유가 생기니 이제야 지금까지의 제 인생에 대해서 돌아보게 됩니다. 근데 과연 우리의 삶과 죽음의 이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옷을 벗었다고 해서, 이 모습을 벗었다고 해서 죽는 게 아니에요. 옷을 벗으면 자기 차원대로…, 아니 내가 텔레비전을 보니까요, 배를 갖다가 놓고, 같은 배인데도 크고 작은 것을 가리려고 기계에 넣고선 굴러 떨어지게 합디다.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굴러 떨어지게 해요. 그렇게 해서 같은 배건만 크고 작은 걸 가려 내더라고요. 그러고는 작은 건 작은 것대로 큰 것은 큰 것대로 중간 것은 중간 것대로 놓고 팝디다.

그러니 천차만별의 그 모습들을 죄 각각 놓고 우리가 경쟁을 하고 있는 거죠. 바로 여러분이 살아온 습, 그 습으로 인해서 오는 인과, 인연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니까, 그것이 업이 되는 거죠. 이게 악업이 되느냐 선업이 되느냐. 사랑을 하다가도 어떠한 문제 때문에 헤어지면 악업이 되죠. 선업이 그냥 순간에 악업이 돼 버리고 말죠.
 
그러니 이 악업 선업이라는 자체가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은 짐작도 못 하실 겁니다, 아마. 여러분 몸뚱이 속에 다 들어 있어요. 가지각색의 모습을 해 가지고, 의식을 가지고, 하나도 벗어날 수가 없는 그 업식의 굴레에서 그냥 그대로. 컴퓨터에 넣으면 그대로 나오듯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업식이 딱, 아주 기정사실로 들어 있거든요. 그렇게 뺄래야 뺄 수 없고, 끼울래야 끼울 수 없이 그대로 입력이 돼서 그렇게 나오는 것을 팔자 운명이라고 하죠. 그리고 영계성, 세균성, 윤회성, 업보성, 인과성 이 모두가, 거기에 속해서 나오는 것이 전부 몸 안에 들어 있어요. 부인 못 할 겁니다, 아마.
 
그래서 나로부터 이 세상이 벌어졌고, 나로부터 상대가 생겼고, 나로부터 업식이 있는 거니까 내 탓으로 돌리라고 하는 거죠. 묘한 거는,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다는 겁니다. 과거에도 이렇게 살았어요. 인과라든가 유전성이라든가 세균성, 업보성 또는 영계성까지도 모두 종합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인과가 되는 거죠. 그래서 자동적으로 입력이 된 겁니다.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입력이 된 대로 여러분을 지금 이끌어 가고 있죠.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한 치도 벗어날 수 없게 녹음이 돼서, 그 속에서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서 나오는데 거기에 말려서 그것이 습성으로 돼 버리고 말았죠. 그렇게 모두 살아나가고 있죠.

그런데 이 입력된 것을 어떡하면 없앨 수 있을까?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입력이 된 데다가 되입력을 하면 앞서 입력된 것은 없어지는 것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그 자리에다가 믿고 되놔라. 제 나무는 제 나무 뿌리를 믿어야 되느니라." 했습니다.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수분과 에너지를 흡수해서 모두 올려보낼 수 있어서 나무가 푸르르게 살 수 있는 것이지 남의 뿌리, 남의 나무를 믿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빌어도 그건 기복이며, 그건 이익이 하나도 가지 않는 것이며 공덕이 될 수가 없죠.

천체가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진리를, 하나로 묶여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같이 살고, 같이 말과 마음이 이어지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바로 여래라고 하죠. 그리고 공덕이라고 하고요. 일을 할 때에 한 사람이 하는 것도 있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관여가 된 사람들은 전부 모여야 해결이 돼요. 모이지 않곤 혼자 해결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더불어 같이 모여서 공동 분담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우리가 공(空)해서 전체가 다 이어져서 돌아가니까, 내 주인을 근본으로 치고 그 내 마음의 주인으로 인해서 모두 보풀어져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몸뚱이 속의 모든 중생들이 의식들을 꼭 그렇게 가지고 있으니까, 이 몸뚱이가 배라면 내 마음의 선장이 그 자생 중생들을 다 태워 가지고 지금 다니는 거거든요. 이 배에 탄 중생들은 다 선장의 그 마음을 따르게끔 돼 있어요. 즉 말하자면 그 마음의 선장에 따라 질서 있게 행동과 작용을 하게 돼 있죠. 그러니까 악하게 ‘어휴! 저놈을 죽였으면 좋겠다.’ 하면 이 안에서도 '저놈 죽였으면 좋겠다' 하니까, 그쪽으로 음파가 그냥 가 버려요. 그래서 그쪽에서도 그냥 더 마음이 부풀어지면서 '두고 보자.' 하게 또 만들거든요.

그러니까 이 몸 안에서 의식들이 내 마음 채찍의 다스림에 따라 나가서 마음도 조절하는데, 나쁘게 조절하느냐, 평화스럽고 아주 좋게 해결사로서 조절을 하느냐 하는 것도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이건 기정사실이에요. 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식을 가지고 있고 천차만별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또 악업 선업의 천차만별의 업을 가지고 있으니까 거기서 하나하나 나오는 대로 '으음,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해결할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가 놓아야죠. 그러면 통신이 돼서 다 결정이 되지만, 그렇지 않고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고 자꾸 생각을 하게 되면 그 생각에 의해서 작용을 해 주거든.

그러니까 하시라도 마음을 넓게 가지면서 거기다가 놓으세요. 만약에 꿈을 꾸었다든가, 상대가 어떠한 문제로 인해서 잘못돼 돌아갈 기미가 보인다든가, 나를 그냥 꼭두각시로 만든다든가, 또는 적대시한다든가 이런 문제들이 허다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될 기미를 알게 되면, '너만이 그렇지 않게 할 수가 있잖아. 그 마음들과 둘이 아니게 내 마음으로 쓸 수 있게끔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모든 것을, 신호를 거기다 맡겨 놓을 때에, 이건 의학적이기도 한데, 대뇌를 통해요. 그리고 그다음에 소뇌를 통하고 중뇌에서 결정을 지어요. 결정을 짓게 되면 하달이 돼요. 사대(四大)로 통신이 돼요. 통신이 돼서 제각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그때는 뛰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에요. 안과 밖으로 다 뜁니다.
 
그래서 내면의 절차가 다 잘되어 있어야 외부의 절차가 다 잘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에서 깨진 바가지가 바깥에 나가면 새지 않느냐' 하는 속담이 있죠. 그러니 내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의식이 바로 내 주인이자 내 하인이고, 내 육체가 또 그네들의 주인이자 바로 심부름꾼이고, 관리인이자 집합소가 되죠.
 
그러니까 더불어 같이 사는 거지, 개별적인 혼자가 없어요. 모두들 살아나가는 데 내가 했고, 내가 살고, 내 것이고…, 이러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내 것이 없다면 바로 욕심이 다 떨어지는 겁니다. 보세요. 내가 벌어 놨다 하면 그게 조금만 없어져도 그냥 안타깝고 그렇지만 더불어 내 거다, 더불어 한마음의 거다 한다면 가지고 다녀도 무겁지도 않고요, 도둑맞을 일도 없어요. 하하하…. 또 생짜배기로 돈이 나가지도 않을 거고요. 모두의 돈이라고 그러는데, 더불어 같이 공유하는 돈이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짜배기로 나갑니까? 그러나 내 거라고 그런다면 무슨 핑계를 대더라도 이놈의 돈이 나가거든요. 

우리가 세계적으로 볼 때도요, 전부 상대를 놓고 기도를 하게 만들어 놨고, 전부 상대를 놓고 하고 있죠. 참, 그것도 기적이지. 어떻게 그렇게 상대를 놓고 빌게끔, 기도하게끔 만들어 놨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에요. 자기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그 사실을 안다면…, 이건 누가 대신해 줄 수가 없어요. 집 안에 들어가서도 말 못 할 일이 생기고, 말도 못 하고 자기 혼자만이 알고 있어야 하는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니죠. 남을 위해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다 그렇지요. 혼자 먼 산 보고 울어야만 하고, 자기 혼자 새겨야 하고, 혼자 참아야 하는 일들이 건건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올 때도 혼자 왔기 때문에 갈 때도 혼자 가야죠. 그런데 혼자 온 것이 없기 때문에 혼자 갈 것도 없다 이런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영원하다' 하는 것은, 자기가 태어난 그 자리에 다시 와서 자기를 다시 형성시켜 놓고 자기는 옷을 벗듯이 그냥 벗어 버리는 거니까 영원히 사는 거지요. 우리가 죽었다, 살았다 하는 것이 바로 저녁이면 잠자고 아침이면 깨고, 이러는 거와 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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