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에 지침이 되도록 한 말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건전한 게시판 문화를 위하여 성격에 맞지 않는 게시물, 광고 등 유해성 글들은 관리자가 임의로 이동, 삭제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질문을 올리기 전에, 게시된 글들을 참고하시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마음공부에 지침이 되도록 한 말씀…

본문

질문

큰스님 법문을 들으면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생활을 하다 보면 마음이 많이 일렁거립니다. 믿음이 부족한 탓이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데 있어 지침이 될 수 있게 한 말씀 일러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홈페이지관리자님의 댓글

홈페이지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전력을 끌어 쓸 때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듯이,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고 큰 것은 큰 것대로 용도에 따라서 끌어 쓰듯이, 우리는 자유자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모자라고 항상 어렵고 항상 괴롭고…. 내가 생각할 때는 괴로운 게 하나도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가 몸뚱이를 가지고 사는데 말입니다, 콩씨로 예를 들자면 콩씨가 없어지는 게 아니죠. 콩나무가 없어지는 거지. 그래서 콩나무로 화(化)했다가 콩이 열려서 콩씨가 돼 가지곤 연방 또 콩나무가 되고 또 나오고 또 되고 또 나오고 그러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에라! 이거 얼마 있으면 죽을 텐데 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건 지속적이고 불생불멸인데요.

우리가 살다가 죽어도 그 생명의 근본만은 되남습니다. 불씨만은 되남습니다. 그래서 어느 스님이 남에게 작대기로 자기를 때리게 해 놓고 "당신은 나를 때리지 않았소!" 한 뜻과 같습니다. 그것과 동시에 한마디 더 한다면, 삼천대천세계를 막론하고 우리가 다 죽는다 하더라도 불씨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 불덩어리가 다 타 버린다 해도 타는 사이가 없고, 다 안 탔다고 해도 안 탄 사이가 없어요. 어떠한 물질적인 불씨를 가지고 말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력이 오고 가는 걸 보지 못하듯이 마음의 광력이나 자력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광력과 자력과 통신력이 모두 주어져서 사람들이 살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항상 되남아서 영원토록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하나가 돌아가는 자체를 볼 때에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니까 떡이라고 표현을 했겠죠. 그러니까 그 떡이란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떡 속에서 수만 개가, 즉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수만 개로 번져서 나가도 나간 사이가 없고, 수만 개를 들여놔도 들여놓은 사이가 없고, 두드러지는 사이가 없고, 줄어드는 사이가 없이 그렇게 영원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되주고 되남는다는 얘기죠.
 
여러분이 '죽는다 산다' 이런 말을 하는데 따지고 본다면 이건 물질을 가지고 말을 하는 거지, 영원한 자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자기는 죽은 것도 없고 산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살아 있을 때 열반이라는 것도 있는 거지 죽은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살아서 오고 감이 없이, 발 없는 발로 길 없는 길을 오고 감이 없이 가고 올 수 있어야만이 한 발로 땅을 디딜 수가 있고 한 기둥을 세워서 하늘을 받칠 수가 있다 이 소립니다.
 
예전에 한암 스님이 상원사 적멸보궁에 올라가는 중간에다가 나무 작대기 하나를 꽂아 놓았었어요, 거꾸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여러분한테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꽂아 놓은 거지 “내가 영원히 살았다.” 하고 표시 내느라고 꽂아 놓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조금 아쉬움이 있었던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올라 다니면서도 눈을 뜨지 못하고 귀가 트이지 못해서 어쩌면 저 작대기 하나 세워 놓은 거를 저렇게 알아보지 못할까? 가지, 잎새, 뿌리내린 나무 한 그루만, 그 스님이 그렇게 심어 놨다는 것만 알았지, 도대체 스님이 그 가운데에 말씀하신 거를 영 모르고 있더라.' 이 소리입니다.

'적멸보궁이다'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첫째, 내가 죽어서 나를 봐야 됩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나를 볼 수가 없죠. 다음에, 함이 없이 할 줄 알아야 하고,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줄 알아야 모든 것을 타파해서, 즉 말하자면 저 바닷물이 젖지 않는 도리를 알아야 적멸(寂滅)이다 이겁니다. 적멸! 사람의 몸이 죽어서는 절대 적멸이 될 수 없고 열반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내가 어질고 착하고 부드럽게, 항상 남한테 이익하게 하면서 잘못된 것은 내 탓으로 돌리라 하는 것은, 내가 잘못했을 때만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 자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었더라면 부딪침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고 잘못됐다 잘됐다 할 것도 없는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먼저 내가 태어난 탓이지 누구의 탓을 할 게 뭐 있겠습니까? 사람이 모두 그렇게 사셔야죠. 짧은 것도 옳다, 긴 것도 옳다, 또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데요.” 하는 것도 옳다. 그러면 “긴 것도 아니고 짧은 것도 아닌 게 옳다면 그냥 아주 없는데요.” 이러더라도 그것도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마음공부 하는 데에 지침이 될 수 있고, 내 그 마음에서 모든 게 지혜롭게 타파될 수 있고, 물리가 터질 수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가 좀 더 마음이 뛰어나서 넓게 볼 수 있다면 넓게 생각할 수 있고, 넓게 생각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걸림이 없습니다.

과보라는 게 뭡니까? 인과응보라는 게 뭡니까?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 이 모두가 뭡니까? 내가 죄가 없다면 겁나는 게 아무것도 없듯이, 내가 그렇게 하지 않고 돌아가니까 영원히 걸림이 없이, 끝 간 데 없이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 소립니다.

목록

대한불교조계종 한마음선원(13908) 경기 안양시 만안구 경수대로 1282Tel. 031-470-3100Fax. 031-470-3116
Copyright (c) 2021 HANMAUM SEONWON. All Rights Reserved.
"이 제작물은 아모레퍼시픽의 아리따글꼴을 사용하여 디자인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