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탕진하는 오빠가 원망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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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가족으로 만난다는 것도 참으로 공부의 인연인가 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저희 오빠가 계속 이런저런 이유로 집안 재산을 거의 탕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공부하는 불자로서 마음을 내 줘야 하는데 원망하는 마음이 앞서 관하는 마음이 생기질 않아 괴롭습니다. 제가 마음을 녹이고 잘 관한다면 오빠도 정신 차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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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사실 알고 본다면, 그저 부처님 앞에 가서 빌어도 나를 위해서지 딴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죠.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빈다 하더라도 자기를 위해서 그러지 그 상대를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죠. 내가 보기가 안됐고 내가 살기가 어지럽고 내가 당장 좋지 못하니까 비는 거죠. 그렇듯이 정작 그렇게 상대와 나를 위한다면 안으로 불을 켜세요. 우리 한 식구가 열 명이라도 가설이 다 돼 있습니다. 마치 한 집안에 불을 켤 수 있게끔 가설이 된 것처럼요. 그런데 가설은 다 돼 있지만 스위치를 눌러야 불이 켜지죠. 그러니까 바깥으로 불을 켜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러면 불은 안 들어와요. 스위치가 눌러지지 않으니까, 통신이 되지 않으니까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바깥에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 한마음이 내면에 통신이 되면 통신이 되는 대로 그 통신을 받고, 빛보다 더 빨리 움죽거려서 응신으로서 나투어 줍니다. 예를 들어서 장애자로서 벌어먹지 못하고 그냥 극매는 것을 본다거나, 소가 도살장에 가는 것을 본다든가, 또 싸움을 해서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본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을 때도, 가족이나 친척의 문제들도 내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 뭐냐 하면, 마음으로서 ‘어휴, 저거….’ 이런 게 있죠. 그냥 남을 해치기만 하고 일가친척인데도 그냥 뜯어먹으려고만 하고 이러면 마음이 가질 않죠? 마음이 가지 않으니까 건져지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 이런 도리를 배우는 사람에 한한 것이죠. 내면에 꼭 ‘둘이 아닌데 모두가 불쌍하잖아!’ 하고서 거기다 맡겼을 때에 바로 무명이 벗겨지는 겁니다. 그러면 거기도 불이 들어오게 돼 있어요. 그게 건지는 겁니다. 이 모두가 병을 낫게 해 줘도 건지는 거, 또 마음의 병을 낫게 해 주는 것도 건지는 겁니다.
요즘은 이런 예가 많이 있습니다. 단전호흡을 하다 잘못돼 가지구요, 몸을 부들부들 떨고 그냥 이러고저러고, 미친 사람 모양으로 밥도 떠먹지 못한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왜 그렇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가지고 오느냐고, 그러고선 잘 이렇게, 오는 대로 가르쳐 줬죠. 가르쳐 주었더니 지금은 아주 괜찮게 나았어요. 그러니 그게 마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까?
이 마음에서 통신이 되면 모두 작용을 해 주기 때문이죠. 작용만 해 주는 게 아닙니다. 이 몸도 혹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기권에서 대기를 해야만 됩니다. 이 세포 하나하나에 생명들이 돌아가면서 우주간 법계를…, 법계라고 합니다, 법계! 그럼 지구에도 그런 법계가 있느냐? 지구에도 세포가 있죠, 인간에게도 세포가 있고요. 그래서 세포가 있기 때문에 대기권에서 대기를 한단 말입니다.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항상 마음으로써 그렇게 전달을 하면 안에서 누진(漏盡)으로 해서, 즉 골수로 해서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통신이 되면, 왜, 군인들이 통신을 받으면 재깍 돌진하죠? 재깍 일어나서 작용하죠? 그렇듯이 재깍입니다. 그러면서도 빛보다 더 빨라서 그 순간에 미국도 갑니다. 그 순간에 지구를 벗어날 수도 있구요.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미국의 지원에서 “스님, 각혈을 하고 영 이렇게 낫질 않는데 관해도 안 됩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이럴 때 내가 뭐라고 그럽니까? 알았다고 그러지. 하하하. 거기에 무슨 말이 필요하냐 이겁니다. 또 그 사람이 죄업이 많아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죄업이 많다는 생각이 들면 그거는 못 합니다. 즉 말하자면 죄고 뭐고 다 둘로 보지 않고 나로 보는 거죠. 이런다면 바로 재깍, 또 전화가 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피가 다 멈추고요, 이제 멀쩡해요.” 이렇게 말을 할 때 나는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알았어.” 하고 대답할 때나 나았다고 하는 전화를 받을 때나 똑같은 기분이에요. 더하고 덜함이 없어요.
그런데 이 공부를 하게 되면요, 깨친 사람은 잘해도 잘한 거고 못해도 잘한 겁니다. 그게 못한 것이 아니니까요. 뭐가 잘못된 사람이 “남들하고 똑같이 스님한테 오는데 왜 고쳐지지 않습니까?” 이러거든요. 그건 마음이 삐뚤어져서 자꾸 달아나가는 걸 어떡합니까? 그럼 달아나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겁니다. 막다른 골목이 되면 그때는 다시 돌아서게 돼 있거든요. 그때에 해야 부러지지를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이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안 해 보면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지를 전연 모릅니다. 마음이라는 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보배라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런데 보배를 보배로 쓰지 않고, 허허, 뭘로 쓸까요? 독사처럼 쓰기도 하고 또 강도처럼 쓰기도 하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러면은 요다음 생에는 그냥 그 모습을 해 가지고 또 나와야죠. 그러니까 우리가 한 대로 아주 조금도 에누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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