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일은 잘되는 듯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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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공부를 하다 보니 어떤 경계가 닥쳤을 때 소소한 일은 관하면 잘되는 것 같은데 막상 큰일이 닥쳤을 때는 관해도 잘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제 믿음이 부족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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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부처님 공부를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 생활이 부처님의 법이자 생활이지 우리들의 생활이 없이, 못났든 잘났든 우리들이 없이 부처님 법이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에요.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우리가 못났든지 잘났든지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고, 삼세를 초월함이 있고, 우주가 있고, 천차만별의 만물이 있고, 끝없이 흘러 도는 이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마음을 가지고도 왜 내 마음대로 못 사는가. 여러분은 여러분 육통 안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육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바로 공기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에 한 치도 실천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누적이 돼서, 집착에 누적되고 욕심에 누적이 되고, 바깥으로 살아나가는 것을 보고 끄달리거나 안에서 해 오던 습성이 모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눈을 가리우고 귀를 가리우고, 한 다리로 절름발이로 걷게 되고, 애꾸눈이 되고 그러는 거죠, 다.
그래서 이 공부하는 사람들이 신발 한 짝은 무의 세계에 두고 한 짝만 신고 나왔어요. 그 신발 한 짝을 내가 마저 신을 줄 알아야,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같이, 용무를 스스로 하게끔 돼 있는 것입니다. 즉 평등공법을 그대로 여여하게 하시고 가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거수일투족, 뿌리와 싹이 같이 붙어 있기 때문에 내가 믿느냐 안 믿느냐 이런 말도 붙지 않는다 이랬죠. 종자를 심으면 뿌리로 화하고 뿌리로 화해서 싹을 형성시킵니다. 비유를 하자면 말이죠. 그래서 그 싹은 바로 제 뿌리를 믿어야 싹과 뿌리가 상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과거에 살던 나와 현재에 사는 나가 상봉을 해야 진짜 공부를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듯이 지금 그 싹은 뿌리에서만이 자기를 잘 살게 할 수 있구나 하는 거를 의심을 갖지 말고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만 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옛날처럼 싹이 어딨는지 뿌리가 어딨는지 모른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머리가 깨이고, 물리를 알고, 또 과학이 어떤 건지 이론으로라도 알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안방에서도 보고 하는 사람들인데 어째서 그걸 모르겠습니까? ‘이게 뭣고?’ 하고서 십 년을, 백 년을 있어 봐도 깨서 먹어 보지 못한다면 맛도 모르고, 종자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이루지를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네 나무는 네 뿌리를 믿고 거기다가 다 맡겨라. 어떠한 바람이 불어도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벌레 먹은 잎새가 있다 할지라도 모든 거를 다 거기다가 맡겨라.” 하는 거죠.
그러면 몸이 아픈 경우에는 바로 마음 도리에서 스스로 약사가 돼 줍니다, 몰라서 그렇지. 그래서 그 도리를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반야줄을 쥐고, 즉 말하자면 내 주인공 그 뿌리를 쥐고서 ‘너만이 할 수 있어!’ 할 때에, “여보!” 하는 순간 남편이 되고,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되듯이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게 될 때 바로 약사로 화한단 말입니다. 화해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시는데, 왜 못 믿고 바깥으로 그렇게 끄달리느냐 이겁니다.
그러면 약사만 있느냐. 그게 아닙니다. 안 되는 일이 있거나 그런다면 ‘바로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지 않아?’ 할 때에 관세음이 된다 이 소립니다. 가정에서도 찰나찰나, 누가 이렇게 하겠다 안 하겠다 이런 말도 없이 돌아가지 않습니까? “형님!” 하면 형님이 되고, “얘, 아우야!” 하면 아우가 되고, “자네 있나?” 하면은 사위가 되고 이렇게 찰나찰나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것이 따지고 보면, 진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보배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정다웁고, 아무리 부부지간이고 자식지간이라 할지라도 여섯 가지를 대신 못 해 줍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죠? 깨닫는 거, 밥 먹는 거, 자는 거, 똥 누는 거, 아픈 거, 죽는 거 말입니다. 어느 누가 대신해 줍디까? 그러니 이렇게 좋은 보배를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다가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그렇게 놓고 입력만 하세요. 정말이지 진짜로 믿고 그렇게 할 때에 바로 통신이 된단 얘깁니다.
통신이 되면 대뇌에서 중뇌를 거쳐서, 찰나지만 말입니다, 중뇌에서 책정을 해서 사대로 통신이 되면 이 안의 중생들이 다 작용을 해 주게 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 중생들을 다 한마음으로 돌릴 수 있어야 내가 안에서도 조복을 받았고, 바깥에서도 조복을 받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내 하나의 보배를 가지고 일거수일투족 모든 거를 익혀라’ 이 소립니다.
그렇게 거기다가 모든 거를 맡기면 화해서 응신이 돼서 나투어 주시는데, 뭐가 걱정이 돼서 그냥 바깥으로 끄달리고, “조그만 건 되는데 큰 거는 안 됩니다.” 이럽니까. 큰 거나 조그만 거나 둘이 아니에요. 부처님께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때에, 만약에 천 리를 간다 하더라도 요 문 바깥에 나가는 거리와 같습니다. 우주를 한 찰나에 한 바퀴 돌았다 하더라도 요 문 바깥이나 거리가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렇게 큰 거는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은 자기가 힘이 없으니까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을 먼저 깔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거를 그냥 믿어 보셨으면 좋으련만, 그렇게 잘 배우고 학식과 지식이 많고 모두가 똑똑하셔서, 아시는 게 너무 많으니까 아리송한 거예요. ‘내가 이걸 그대로 믿어야 하나? 이거 뭐….’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기도 없으면서, 자기 몸뚱이의 한 개체에 생명들이 주둔해서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에 내가 어떤 것이라고 내세울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아는 게 많아서 말입니다. 진짜로 아는 게 많다고 말로는 안 그러죠. 그러나 밑바닥에 깔려 있거든요.
그러니까 모든 것은 모르든지 알든지 무조건, 아는 거는 감사하게 거기 놓고, 모르는 거는 ‘너만이 이끌어 갈 수 있고, 너만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고, 네가 네 몸을 형성시켜서 끌고 다니는 거니까 건강하게 끌고 다녀야잖아.’ 하고 관하라 이겁니다.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직결되는 통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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