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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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본문

질문

법화경에 삼계화택이라는 비유도 있듯이 우리가 이 삼독으로 불타는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만약에 이 세계가 빌딩이라면, 우리가 그 빌딩 안에 있는데 빌딩에서 불이 났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옴치고 뛸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하죠? 거기에서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 안에서 살겠다는 생각이 생길 여유가 있겠습니까? 단 하나의 생각만 있겠죠.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가 하는 거요. 빠져나갈 구멍만 찾지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할 땐 그렇습니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하겠습니까? 살아야겠다 하는 건 이차적입니다. 어디로 나가야 빠져나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급하죠.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자체가 그렇습니다. 이 중세계가 불타는 지옥과 같느니라. 상세계와 중세계, 하세계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전부 이 자리에 있느니라. 과거가 흘러갔다고 하지만, 예를 들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은 그대로 있는데 사람은 몇 바퀴를 돌았는가?’ 한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옛산은 그대로 있는데…, 인생은 몇 바퀴를 돌아도 어찌해서 저 산은 그대로 있는가?’ 하는 거요.
 
좀 더 계산을 잘해 보세요. 자기 양심으로써 들여다보면서 자기를 한번 검토해 보세요. 그런다면 ‘내 팔자’ 소리도 안 나올 거고 ‘내 운명’ 소리도 안 나올 겁니다. 현실에 자기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면,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거를 알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미래를 보려면 지금 내가 어떻게 하고 가는가를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그럼 또 미래가 어떻게 올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가닥 줄을 잡고 얼음판 위를 지금 걷고 있습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일체 만물 만생이 다 그 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철모르는 아이들은 얼음이 녹는지 깨지는지 빠지는지, 그것도 모르고 덮어놓고 걷습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사시다가 화를 내면 얼음판을 걸어오면서 모닥불을 놓는 거와 같습니다, 얼음이 얼른 녹으라고. 그래야 빠져 죽기 쉬우니까. 모닥불을 놓는 거와 같고, 그냥 극치에 이르러 마음이 팔팔 뛰면 얼음이 빨리 꺼지라고 막 뛰는 거와 같다 이겁니다.
 
또 때로는 술 먹고 부수기도 합니다. 그런다면 아주 집에다 불을 놓는 거와 같습니다. 즉 말하자면 얼음판이 빨리 녹고 빨리 깨지고 빨리 빠지라구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가족이 다 빠지고, 자기도 빠지게 되니까 그때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살려 달라고만 하는 격이다 이 소립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그러니까 제가 항상 그러죠. “화가 나더라도 그 자리에다 놔라.” 이러죠? 그러면 모닥불을 놓지 않고도 그 길은 걸어갈 수 있죠. 펄펄 뛰지 않아도 그 길은 걸어갈 수 있죠. 가는 데까지 가요. 그러나 모닥불을 놓고 뛰면 얼음은 금이 가고 빠지게 되고, 나로 인해서 주위에 있는 사람까지 다 빠뜨리게 되죠.

“스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합니까?” 이렇게 하시는 양반들도 계실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게 어폐가 있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앞에 50%는 보이지 않게 돌아가고, 50%는 보이는 데서 돌아갑니다. 밤과 낮이 있듯이, 밤에는 자면서 돌아가고 낮에는 깨어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모든 거를, 밤에 도는 거든 낮에 도는 거든, 안에서 일어나는 거든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든, 모두가 더불어 같이 사는 삶이기 때문에 더불어 같이 있는 그 가운데에 놔라 이겁니다. 그렇게 더불어 같이 사는 그 가운데 놓는다면, 내가 망한 일도 없고 내가 흥하게 한 일도 없지만 그 가운데서 나는 중심을 잡고 그래도 사람답게 걸었노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많아도 다 차원에 따라서 살고 있습니다. 천차만별로 사람의 차원이 그렇게 많습니다. 바로 그 차원에 따라서 모습과 자기 소임이 주어지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지게꾼 노릇을 한다 하더라도 누구의 탓을 하지 말라 이겁니다. 부모의 탓을 하거나 형제의 탓을 하거나 남의 탓을 하거나 이렇게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다는 얘기죠. 왜냐? 애당초에 소임을 가지고 나올 때에 넝마로 차원이 돼 있으니까 넝마로 나올 수밖에 없죠. 그건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또 과거로부터 자기가 금으로 차원을 받아 가지고 나왔다면 금으로 살 거 아닙니까?

그런데 금으로 사는 사람 자만하지 말고, 넝마로 사는 사람 너무 자기를 하대하지 말라 이겁니다, 타박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그 가운데서 무엇이 금과 넝마를 다 바꿀 수 있느냐. 아까 얘기했듯이 그것도 다 놓고 묵묵히 자기한테 주어진 거를 마다하지 않고 그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서 모든 걸 거기다 놓는 데서 그것이 무한정으로 없어집니다. 차원을 가지고 모습을 가지고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 그냥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까 ‘한 생각을 뛰어넘으면 그대로 여여함이니라. 한 생각을 뛰어넘지 못한다면 그대로 중생의 모습이니라.’ 했으니 바로 생각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죠. 왜냐하면 지금 세상에 ‘이렇게 돌아가니까 이렇게 되고, 저렇게 돌아가니까 저렇게 되고’ 이런 거는 모두 여러분의 사량입니다. 이건 사람으로선 도저히 할 수가 없다느니, 이렇게 돌아가느니 저렇게 돌아가느니 하면서 사단이 많죠. 그러나 아무리 사단이 많아도 하등 상관이 없이 한 생각에 뛰어넘을 수 있어요.
 
앞뒤 없이 묵묵하게 걸어가다가 문득 옆의 사람이 쓰러질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아서 끌어올려 주는 그것이 바로 중생들을 거두는 것이요, 또 저 먼 산을 보니까 불이 나고 있어서 ‘아, 안 되겠구나. 비가 오게 해야 되겠구나.’ 하고 생각해서 비가 와서 저절로 꺼지게끔 한다면 이 또한 보살행이죠. 누가 비를 내리게 해서 누가 꺼뜨렸는지, 이런 것도 모르면서 그 사람네들은 좋아할 거다 이겁니다. 그 좋아하는 마음들이 바로 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리의 법칙을 우리들은 절대 몰라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고등동물로서 첨단을 넘어서야 될 사람들이, 앉아서 세상을 다 굴리고 세계를 다 굴리고 우주를 다 굴릴 수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비천하게 자기 한 발짝 떼어 놓으라는데도 못 떼어 놓습니까? 

만날 그냥 지지부진하게 살다가 별안간에 주인공 이름만 알아서 주인공에 맡긴다고 그게 되는 게 아니거든요. 진짜 통신이 돼야 그냥, 즉 말하자면 줄을 그냥 탁 대는 대로 전력이 흘러서 탁 붙어서, 불이 번쩍 들어오게 돼 있죠. 평소에 전화 코드를 끼워 놓지도 않고 전화를 하려니, 전화 통신이 되겠습니까. 항상 자나 깨나 전화 코드가 끼워져 있어야, 안에서 일어나는 거든 바깥에서 들어오는 거든 금방이라도 닥쳐오는 그런 것을 해결하려면 전화에다 대고선 통신을 해야 통신이 돼서 그걸 전부 다 알아듣고 소임을 제대로 하죠. 

나도요, 여러분과 같이 살얼음판을 걸어가면서도 빠져 죽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타 죽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얼음이 깨질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고,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그냥 걸어가고 있습니다, 허허허. 그러니까 여러분도 생명의 근본을 붙들고 생명을 아끼지 마시고, 부지런히 뛰시면서 부지런히 거기다 놓고 가시면, 그대로 바퀴의 굴림이 저절로 정신세계의 굴림과 물질세계의 굴림이 동시에 같이 돌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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