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가 없다 하심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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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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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보가 없다 하심은?

본문

질문

불자로서 인과응보의 이치를 믿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큰스님 법문에서 가끔 업보도 없다는 말씀을 하시니 좀 헛갈립니다. 그 뜻을 다시 한번 가르쳐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업보가 ‘있다’고 한다면 업보가 있게 되고 소멸이 안 돼요. 여러분의 마음이 진짜 중요한 겁니다. 마음이 생각을 그냥 하고 사느냐, 한생각을 하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가 생각을 할 때 자기 혼자만 생각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몸에서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다 같이 해 주기 때문에 생각을 할 수 있다 이 소립니다. 그거를 알면 한생각이 되는 거고 그걸 모르면 그냥 생각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이 과거로부터 그 수많은 세월을 걸어오면서 쌓은 습을 어떻게 단번에 소멸을 시킵니까? 참회했던 마음이 없어지고 또 일을 저지르고, 이렇게 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몸은 시자일 뿐이다. 심부름꾼일 뿐이다. 나의 원동력인 근본이 나를 움죽거리게 하고 보게 하고 듣게 하니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라.” 하는 겁니다.

죄를 지었든지 안 지었든지 모든 거, 일거수일투족을 다 거기다가 맡겨라, 이러는 겁니다. 왠 줄 아십니까? 살아오면서 쌓은 습관과 업장이 너무 두터워서 그 업장을 소멸시키는 데는 그 방법밖에는 없다는 얘기죠. 모든 걸 갖다가 관하고 놓으면 그거는 소멸이 되니까요. 소멸이 되니까 이루어지는 겁니다. 소멸이 안 되면 그게 이루어지지 않죠.

그러니까 ‘중생이라고 할 것도 없다. 부처라고 할 것도 없다. 당신네들이 그대로 법신이고 그대로 보현신이고 그대로 부처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고 생각하면 법신이고 몸을 움죽거렸다 하면 보현신이다. 보현신은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 모든 걸 감싸고 움죽거려 주는 게 보현신이다. 마음으로 생각해서 처리하는 것이 법신이다. 가만히 있으면 그냥 부처님이다. 그러니까 아주 이 한 생에 빨리 깨쳐서 다 소멸시키자.’ 하는 뜻입니다, 나는.

그런데 소멸이 되면서도 또 공덕이 되는 것은 뭐냐. 거기다 자꾸 입력하면 소멸이 되니까 공덕이 되는 거죠. 업식과 업보와 업력이 다 소멸되니까, 자꾸자꾸 하나하나 없어지니까 집안이 조금 편안해지더라, 이런 거죠. 여러분의 마음으로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아는 거예요. 양심 때문에 부처님 법이 요만큼도 에누리가 없는 거죠. 자기가 아는 것을 이 세상 일체 만물의 부처님들이 다 알고 있고, 또 일체 만물도 다 연결이 되니까요.

알고 보면 아주 요만큼도 에누리 없는 것이 자기의 마음이죠. “야호” 하면 자기가 “야호” 한 것이 다시 되돌아와서 자기한테 들리듯이, 내가 마음을 냈을 때, 아무도 몰라도 내가 알고 있으니까 상대에게도 다 퍼져서 알게 돼요. 그래 어떤 사람이 뇌물을 갖다 주니까 받지 않더랍니다. “아무도 없는데 좀 받지 그러시느냐.” 그러니까 “너도 있고 나도 있지 않으냐.” 그러더라는 거죠. 

이 세상에서 빨리 지혜롭게 공부하시려면, 내가 항상 말씀드리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점프해서 넘어가도 된다. 수상행식이라는 것도 첨보해서 원심으로 만들어라.” 첨보하면 그거를 다 뛰어넘는 거죠. 원심이란 쉽게 말하자면 공식(共食)이죠. 한데 합쳐진 한마음을, 의식을 말하는 거죠. 먹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라, 전체가 살아나가는 것을 한데 합쳐서 무의 세계나 유의 세계를 대처해 나가는 거를 공식이라고도 할 수 있죠.
 
수상행식이 따로 있습니까? 사람이기 때문에 업보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고 잘하는 것도 있고,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고 이러는 거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저지를 줄 알기 때문에 또 고통이라는 것을 알고 슬픈 걸 알고 아픈 걸 알기 때문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예 그냥 잡아먹고 먹히고 이러는 거나 안다면 어떻게 부처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고등 동물입니다. 그렇게 수억겁을 거쳐 오면서 그 아픔을 겪어 온 장본인들이에요, 우리가. 그래서 그렇게 거쳐 왔기 때문에 인간은 감수성도 빠르고 상상력도 빠르다는 얘기죠.

우리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 빠른 감수성과 상상력이 그대로 행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죠. 어떻게 생각하세요? 도둑질하는 그런 감수성 말고요. 도둑질하는 그런 상상력은 말고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저거를 대치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뛰어넘어서 좀 잘되게 할 수 있나, 이런 거 말이에요. 부처님의 마음이 전체가 보살이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마음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지금 마음공부 하는 분들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용도에 따라서 물에 가면 바로 주해신이 되고, 산에 가면 주산신이 되고, 들에 가면 지신이 되고, 또 아프다고 하면 약사 보살이 되고, 누가 명이 짧다 하면 바로 칠성 부처로 화하고, 또 좋은 데로 못 간다 하면 지장으로 화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 돌아가거든요. 남들처럼 다, 손 달리고 귀 달리고 눈 달리고 다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왜 못 합니까? 

그리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그 상상력, 감수성으로 마음대로 다 행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그럼, 보이지 않는 데서 그렇게 뛸 수 있다고 하는데, 뭣 때문에 마음으로 그렇게 뛰나 하시겠지만 급해 보세요, 여기서 천 리는 못 뛰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도리를 안다면 천 리도 마다 안 하고 만 리도 마다 안 하고 뛸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바로 심성, 무의 축지법이죠, 알기 쉽게 말하자면. 그래서 어디를 가도 자기가 그냥 보살행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를 가다가 남이 죽은 데 가서 영계성과 만났을 때 바로 거기다가 놓고 관하세요. 지금 그거를 다 아는 사람들은 관하고 이럴 필요도 없죠. 그대로 보는 순간이죠. 하지만 배우는 사람들은 관하고 그것을 그렇지 않게끔 하면 그 영가는 바로 화해요. 좋은 마음으로 화해서 천도가 되고 그 아픈 사람은 그냥 일어나게 돼 있어요. 그래서 내 마음을 항상 보살행이 되도록 해야 하는 거죠.

“옛 인연을 새로 이어서 가는…” 하고 청법가를 부르지 않습니까. 그런 거와 같이 마음이라는 거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 가는 거예요.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또 심어서 먹고 이렇게 해서 그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그냥 그렇게 되듯이. 그러면 어떤 사람이 또, 씨앗을 잘 심어서 더 좋은 씨앗으로 만들어서 또 심어서 먹기도 하고 이렇게 하죠. 그렇듯이 우리 사람도 “난 업보가 많아서 이래.” 이러면 업보가 많은 것이고 “난 업보고 뭐고 없다. 내가 없는데 뭐가 있으랴. 내가 공했는데 뭐가 있으랴.” 하면 업보가 붙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모두 한데 합쳐서 더불어 ‘함이 없이 내 인생을 산다’ 이렇게 할 수 있겠죠. 함이 없이 인생을 살고 있다. 함이 없이 사는데 업보가 거기 붙을 리가 없죠. 함이 없이 사는 공한 이 시자일 뿐인데, 공한 모습일 뿐인데 말입니다. 공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업보가 붙을 리가 없죠. 업력이 주둔하고 있을 수가 없죠. 그러니까 잘한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다는 얘기예요. 잘한 것도 없고 못한 것도 없는 그 가운데서 자기가 그대로 생각하고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게 법이다, 이런 소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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