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참선을 한다는 것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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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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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참선을 한다는 것은

본문

질문

요즘은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조용히 앉아서 참선을 하거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생활 참선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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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본원관리자님의 댓글

본원관리자 작성일

인간으로 살면서 혼자 못 산다는 건 여러분이 더 잘 아시죠? 모두가 인연에 따라서 그것이 바로 망하기도 하고 흥하기도 하고, 발전도 하고 창조도 하고, 창조력을 기르기도 하고 이렇게 나가죠. 내가 왜 꼬집어서 이런 말만 하느냐 하면, 최초의 근본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주고받고 주고받고 돌아가는 것이 법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법을 들이고 내는 데는 여러분 각자가 없다면 무효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있기 때문에 인연 소치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돌아가는 그 자체를 바로 진리라고 하죠. 그 진리가 끝 간 데 없이 ‘나’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여러분 각자로 인해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일체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느니라.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 있는고?” 하고 물으셨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 있다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마음에 있다고 하시겠죠?
 
그런데 그것조차도 모르는 분들이 있습니다. 내 마음으로 인해서 여러 분야로 발전도 할 수 있고…. 이 생활이 그대로 과학입니다. 그리고 생활 자체가 그대로 참선입니다. 우주의 근본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끌어 내려서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하여튼, 우리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만법의 근원은 어디 있느냐?” “내 마음에 있다.” “어떤 것이 참선인가?” “생활 참선!” 여러 마디 거론되는 말을 쑥 빼고 지금 얘깁니다.

그래서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되놓아라. 되놓고 침착하게 관찰하라.” 합니다. 그냥 일하면서도, 앉아 있으면서도, 서 있으면서도, 누워 있으면서도 무엇을 하든지 참선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서 안 되는 것을 ‘이것이 슬기롭게 돌아가게 하는 것도 여기다.’ 하고 놨을 때에 그게 돌려놓는 것입니다. 됐을 땐 감사하게 놓고, 그리고 진짜 나를, 진실한 나를 구할 때는 ‘참나가 있다는 증명도 거기서만이 해 줄 수 있다.’ 하고 놓고 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을 때 바로 관찰하면서…, ‘관해 본다’ 그러죠? 그거를 ‘관찰’이라고 합시다, 관찰! 그러고서 또 실험하면서 체험하면서, 진짜로 무조건 믿고 물러서지 않는 도리에 놓고, 그렇게 체험하고 돌아가는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틀고 앉아 있는 것이 참선이 아닙니다. 즉 관찰하면서 지켜보면서 실험하면서 체험하고, 진짜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큰 것에서부터 조그만 것까지 내 앞에 용도에 따라 닥치는 대로 놓고 관찰하는 것이 참선입니다. 내가 느끼지 못하고 무조건 그렇게 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게 뭣고?’ 하고 열네 날 있어도 뭐는 뭡니까? 그냥 뭐지!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전에 선지식들께서 표현하시기를 “수박을 놓고 이게 뭐냐고 아무리 돌려 가면서 봐도 맛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조그만 거든지 큰 거든지 내가 실험을 통해서 관찰하고 내가 체험을 해 봐야 그 맛을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참선입니다. 앉으나 서나 누우나 일하나 행하는 것을 좌선, 입선, 와선, 행선이라고 합니다. 그 네 가지가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 것이 바로 생활입니다. 그래서 생활 참선이라고 합니다. 생활이 그대로 참선이자, 이 세상 돌아가는 일체 만물만생이 다 공안이 될 수 있고, 만물만생이 살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도량이 될 수 있고, 내 앉은 자리가 될 수 있다 이겁니다.

어디로 찾아다닌다, 또는 모르는 게 있으면 경전을 들춰 본다고 해서 그 진의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든 알든, 못났든 잘났든, 내가 길을 가다가 엎드러졌으면 그 땅을 짚고 일어서야죠. 땅을 짚고 일어나야 됩니다. 그래야 다리 절름뱅이가 올바른 사람이 되는 거죠, 정상적인 사람이. 우리는 50% 무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절름발이입니다. 그래서 다리 한 짝을 마저 일으켜 세우는 도리를 공부하는 겁니다, 지금. 그리고 눈은 애꾸입니다. 눈 한 짝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한 짝을 마저 뜨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마음자리에서만이 일체 만법이 나고 들고 나고 들고 하는 거니까요. 그것을 지켜보고 관찰하면서, 실험하면서 체험을 안 한다면 그건 참선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내 몸으로나 가정으로나, 모든 것을 습득을 해서 모든 관습을 놓고 실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알고 보면 상당히 쉬운 일인데도 자기를 자기가 못 믿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못 믿고 뭘 그렇게 알아야 하고 따져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잘 배웠고 잘났고, 똑똑하고 못났고, 못하고 못 배웠고 이런 거를 몽땅 다 놓는 것입니다.

놓는 거라고 하니까 놓는 거에 또 걸리지 마십시오. 내 육체를 나라고 하거나, 내가 했다고 하거나, 내가 가졌다고 하거나, 모든 걸 나라고 일으켜 세운다면, 모두 둘로 보이기 때문에, 상대로 보이기 때문에 잘했다 못했다가 연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오는 겁니다. 그리고 업이 녹질 않아요. 과거에 입력된 것이 살살 나오는 위에다 또 자꾸 업을 지어서 미래에 나오게끔 입력하는 것입니다. 지금 입력되는 거는 미래에 가지고 나올 것을 미리 저장을 하는 거죠. 저장 아닌 저장이죠. 여러분이 그 업을 안 지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이건 자동적으로 되는 거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여러분이 각자 자신을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은 육을 끌고 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 내 신을 두고 남의 신을 찾고 믿어야 하겠습니까? 자신(自神)을 두고! 자신은 정신계에 속하고, 육은 현실계에 속하는 겁니다. 항상 육은 끌려다닙니다, 마음의 주인한테. 그러니 잘못 돌아가는 거는 거기다 되놓고 잘 돌아가게 해서 서로가, 누가 더 높고 얕음이 없이 상통하면서 같이 작용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같이 작용을 하는데, 지금 유심(有心)에서는 도저히 정신계와 물질계가 한데 작용을 하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걸 새삼스럽게 말하는 건 아니지만 현재 그렇게 가고 있으니 그걸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게 뭣고? 이렇게 되는 거지, 저렇게 되는 거지. 이게 틀리지, 이게 옳지.' 이런다면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믿고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이끌어 갑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따져야 하는 마음이 생기십니까?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는 겁니다. 아무리 따져 봤자죠. 그러니 ‘이렇게 해야 맞지, 저렇게 해야 맞지’ 하고 자꾸 잔소리가 심하고 이론이 많아지고 그런다면 전자와 전자가 어떻게 마주 붙어서 불이 들어옵니까, 네? 자기한테 자기가 따지려고 드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어야 합니다. 자기 주먹만을 믿고 주먹에서 나오는 거 주먹에다가 도로 놓는 마음! 이 세상을 다 지닌 한자리, 그 주먹 아닙니까?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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