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에게 서운한 마음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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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애지중지하던 자식을 장가를 보내고 나니 이 부모를 본척만척합니다. 마음공부 하면서 서운한 마음도 다 주인공 자리에 놓고 그 마음 돌려 보려고 애쓰지만 자식에 대한 착 때문에 그런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마음 잘 다스리고 마음 중심 잘 잡고 갈 수 있도록 한 말씀 일러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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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 인생이 어떻게 하고 가는가. 사람은 공부할 때는 부모에 따라서 공부를 합니다. 아무것도 보지 않습니다. 상대성을 놓고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인간관계를 제대로 갖지 못하면서 친구들하고 몰려서 공부만 하다가 대학을 졸업합니다. 졸업을 해서 사회에 나갔다고 하나,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더라도 공부를 또 해야 한다 이 소립니다. 사회에 나가면 벌써 인간관계의 공부를 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인가 하는 사회를 공부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맡은 분야를 공부합니다. 자기가 전자에 공부했던 것을 바탕을 삼아서 잘하려니까 또 공부를 해야 합니다.
허둥지둥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일을 하다가 보니까 가정이 생겼고 자식이 생겼고, 나중에는 자식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부부간에 믿게 되고, 이렇게 살다가 보니까 늙어서 오십이 넘고 정년퇴직하게 되면은 어떻게 되느냐.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됩니다.
자기가 그렇게 생각을 했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하, 나를 받쳤던 이 서까래가 하나둘 빠져 달아나가는구나.’ 이런 걸 느낍니다. 나중에는 하나둘 하나둘 다 빠져, 오두마니 그냥 자기 기둥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두마니 기둥만 서 있다가 홀연히 생각을 하니까, ‘아하, 내가 빈손 들고 나왔다 빈손 들고 가는 이 마당에서 이 기둥 하나 선 것마저도 쇠퇴해 가는구나.’ 하면서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런저런 생각 하는 게 준비입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도리를 모르면, ‘야, 이놈의 자식들아! 너희를 내가 뛰면서 어떻게 가르쳤고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먹여 살렸는데, 너희들은 나한테 이렇게 하느냐. 너희들은 너희 살 궁리만 하고, 나는 한 달에 한 번 보거나 말거나 하는구나.’ 하고선 아주 노여워하고 노발대발하고 그냥 척이 집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 세상살이가 그런 거지. 본래 그런 거 아닌가? 저것들이 바로 나이기 때문에, 바로 나이기 때문에 나는 섭섭할 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구나.’ 이러고서 그냥 홀연히 아주 안치를 해서 자기가 자기를 놓고 그냥 여여하게 좋게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마음 한번 먹기에 달린 건데, 나 괴롭고 자식들 괴롭게 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 자식은 바로 내 씨가 내 나무를 만들었고 내 나무에서 또 씨를 만들어서 나간 것이기 때문에 바로 나인 것입니다. 부모도 미래의 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마음이 그렇게 홀가분하게 좋은 것입니다. ‘그래, 네가 속 안 썩이고 잘 살고, 네가 잘하고 사는 것이 나한테 갚는 것이구나. 나한테 갚을 것도 없다. 네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잘해라. 잘 살아라.’ 이러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날 싸우게끔 되고 척이 지고 ‘이놈의 자식, 저놈의 자식’ 하다 보면 그렇게 혼란스러운데 어떻게 복이 들어가겠습니까? 돈도 웃고 즐기는 데 들어가기 좋아하지 찌푸리고 싸우고 그러는 데 들어가기 싫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좋아하는 사람도 하나 없습니다. 가정도 만날 싸우고 그러면 자식들도 ‘아유! 우리 엄마 아버지는 만날 싸워. 아이, 들어가기도 싫어.’ 이렇게 돼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침착하게 공부를 열심히, 자기 주인공 그 자체가 일체 만법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꼭 잊지 마시고, 일체 만법을 활용한다는 그 점을, 바로 도심으로써 활용을 할 수 있는 그런, 여기만 가는 게 아니라 우리 국가에도 세계적으로도 우주적으로도 다 할 수 있다는 그 점을, 우리가 무심코 그냥 한 번씩 던져서 행해 보십시오. ‘내가 모르니까 이거 못 해.’ 이러지 마시고요.
패기 있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써 그냥 한 번씩 생활하시면서도 나한테 부당한 일이 올 때, 몸이 아플 때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해 보시면, 영가가 뭐 어떻게 되고 어떻게 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렇게 됐다 이런 것도 다 자기가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되는 것이니 그냥 해 보세요. 그냥 그냥 해 보시면 바로 체험이 되고 체험이 되면 그게 커지고 커지게 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 점을 알게 됩니다.
옛날 얘기 잠깐 하겠습니다. 들은 이야기인데 아마 조선 시대인 모양입니다. 어느 마을에 어떤 사람이 밤만 되면 항상 ‘이놈 때려죽인다’고 미친듯이 도끼나 낫을 가지고선 아무 집에나 들어가서 그냥 찌르곤 야단이 난 겁니다. 그것이 어느 때서부터 그랬느냐 하면, 그 마을이 잘 살았는데 어느 때서부터 갑자기 그런 일이 생겼답니다. 그래서 동네가 다 망하다시피 했는데, 어느 스님이 들어오시다가 그곳에 들르셨답니다. 들르셔서 보니까 ‘아하, 이거 야단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몇몇 사람을 데리고서 “곡괭이하고 삽하고 괭이를 가지고 날 따르라.” 이랬답니다, 아무 말 없이.
그래 스님을 따라서 골짜기로 올라가니까 그 산모롱이에, 왜, 산 혈맥이 있지 않습니까? 혈맥 귀퉁이 거길 파라고 하더랍니다. 그래 파니까, 옛날에 오물 묻었던, 넓게 지하실을 만들었던 자리가 있더랍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뼈다귀가 수없이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그 뼈다귀를 다 태워 버리고 난 뒤에 그 스님 하시는 말씀이, “예전에 일본 마적이 들어와서 여자들을 납치하고 또 그 식구들을 죽이고 데려온 여자들을 죽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도 데려다가 막 죽이고 재산을 뺏고 몰살을 시키고 묻어 버린 그 자린데, 그냥 혈을 끊어서 그 짓을 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이 혈을 따라서 이 동네로 왔기 때문에 이 동네가 이렇게 망한다. 이것을 태워 버렸으니 이젠 괜찮을 거다.” 하고선 부적을 하나 써서 “이것을 마을에 붙여라.” 했답니다.
부적이 그래서 생겼는데, 우리가 그러한 얘기를 들을 때 혈도, 지금 이 공부 하시는 분들은 혈이 산에 이렇게 생겼든 저렇게 생겼든 혈이 이쪽으로 왔든 묘지를 쓰든 또 집을 짓든 이사를 가든, 아무 걱정 없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혈을 우리 마음대로, 혈이 이렇게 됐다면 이쪽으로 이렇게 해 놓을 수도 있고 저쪽으로 해 놓을 수도 있어요. 누가 ‘혈이 없다, 이건 나쁜 터다’ 이러더라도 내가 한번 딱 짚었으면, 지팡이로 딱 짚은 겁니다. 주장자를 말하는 겁니다. 자기의 중심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딱 짚으면 그 자리가 참 좋은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몸도 고정되지 않고 먹는 것도 고정되지 않고, 보는 거 입는 거 모두가 고정된 게 없으니 공한 것이죠. 그리고 내가 나쁘다 하면 나쁜 것이고 좋다 하면 좋은 것이지, 왜 남의 운운에 끄달리면서 노예가 돼 가지고 이리 왈 저리 왈 갈대와 같이 흔들리느냐 이겁니다.
이 공부는 자기 자성불을 이루어서 해탈을 하라는 뜻입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뭐, 구태여 말로 해탈이랄 거 없이 자기한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다 자기한테다 다시 놔라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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