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신경 쓰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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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제가 요즘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꿈에서도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좋게 돌려놓으려고 하는데도 기분 나쁜 꿈을 꾸면 계속 신경이 쓰이게 됩니다. 제가 어디에도 끄달리지 않고 중심 잘 잡고 갈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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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꿈도 꿈이고 현재 생시도 꿈입니다. 저 달이 말입니다, 강에 비쳤다 이겁니다. 강에 비쳤을 때에 그 강에 비친 달은 하늘에 있는 달과 둘이 아니면서 그림자예요. 내가 지금 몸뚱이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내 모습을 내가 마음으로 요렇게 생겼고 내가 요렇게 있다 하는 걸 알고 그것이 바로 잠재의식 컴퓨터에 책정이 된 겁니다. 그래서 꿈을 꿀 때는 항상 그 모습으로 나갑니다. 그렇게 나가서 하루 온종일 살다가 들어왔는데도 한 시간도 안 됐더래요, 온종일 살았는데. 꿈에서는 하루 온종일 살았답니다. 그랬는데 저녁에 밥 얼른 달라고 그러는 바람에 깨 보니까는 한 시간밖에 안 됐더라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자기가 마음으로 자기 모습을 지어 가지고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는 일은 지금 육신을 가지고 돌아다니는 거하고 모습 없는 모습을 가지고 다니는 거하고는 빠르기가 여간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서도 없으니까, 진실은. 그러니 이 육신을 끌고 하루 종일 산 거하고 꿈에 한 시간을 산 거하고 차이가 얼마나 납니까? 그래서 꿈을 꾼다고 하는 것도 모두, 생시나 꿈이나 자기의 모습이 다니는 거니까 자기에다 놔라 이겁니다. 진짜 씨가 있기 때문에 콩나무가 나고 잎과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이 “거기다가 그렇게, 놓을 데 없는 데다가 놓을 게 없는 것을 놔라.” 하는데 진실히 믿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들은 생시에 만나면 일가친척이고 누구고 간에, 애들의 친구든지 내 친구든지 또는 어떤 회사든지 상업을 하는 사람이든지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데 거기서 만남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만나는 사람마다 나하고 저 사람하고 각각 보니까 상대가 생기죠? 그러니깐 업보를 짓는 겁니다, 상대로 보니까. 우리가 여여하게 살면서도 상대를 마음으로는 둘로 보지 않아야 그게 업보가 되지 않는데, 업보에 끄달리지도 않을 거고 말입니다. 현실에 끄달리지 않는다면 꿈에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고 이것도 꿈이요 저것도 꿈이라면, 꿈에 또 끄달리질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내 진짜의 마음 그 자체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겁을 거쳐오면서 별의별 모습을 다 가지고 자기가 살던 그 습성이 모습과 함께 자기한테 자꾸 나타나는 거거든요. 짐승이 와서 나한테 덤볐다, 또는 뱀이 나한테 덤볐다, 꽃이 화창하게 핀 걸 봤다, 또 무슨 도둑이 들었다, 강도가 들었다, 강도가 나를 죽이러 쫓아다닌다 이런 문제들이 여간 많지 않죠. 또 꿈에는 훨훨 날아다니는 사람도 있구요. 그러한 문제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이겁니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죠. 콩 심어서 콩나무가 났으니까 그 작년 콩은 없어진 거죠, 아주. 없는 거죠. 그런데 미생물이 있기 이전부터, 또 미생물이 생겨서 오기까지 그것이 수백 수천 년, 수만 년 그 헤아릴 수 없는 억겁을 거쳐오면서 여기까지 왔어도 온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이 억겁을 거쳐 나온 바로 그분들이에요. 그런데 생각으로서 살던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짐승으로 다니던 습과 천차만별로 거쳐 온 그 습이 남았단 얘깁니다.
살아온 것이 자기 마음의 컴퓨터에 쟁여 있으니까 그것이 때로는 습에 의해서, 인연에 의해서 자꾸 인과응보가 돼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나오는 대로 그냥 주인공에 모두가 둘이 아니게 놓았을 때에는 다 녹아 버립니다. 인연법에 의해서 그 인과응보가 다 녹아 버리고 유전성이 다 녹아 버린단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런 습성을 기르지 않았더라면, 기르려고 그래서 기르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날까지 오면서 습성을 놓고 왔더라면, 지금 현재에 놓고 가는 건데, 그대로 여여하게 놓고 가는 것을 홀연히 깨달았다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이날까지 그 습을, 남은 것도 없고 앞으로 또 쟁여질 것도 없고 전자에 쟁여진 것도 없고 이랬을 텐데 아니, 마음으로 지어서 습에 의해서 그냥 착착 쟁여 놨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돌아가면서 어머니 만날 때 아버지 만날 때, 이런 일 할 때 저런 일 할 때 나투어서 돌아가듯이 그런 업보도 인연 따라서 올 때에, 그렇게 자꾸자꾸 나투면서 지은 것이 진화…, 즉 ‘발이 없어. 발이 없으니 어떻게 되지?’, ‘아니, 내가 네 발로 걸어 다니기보다 서서 다니는 게 편리할 거야.’ 이런 생각을 한 것도 진화력이거든. 그 생각에 의해서 진화되는 거지 몸뚱이로 다니게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돼요. 여러분도 다 꽁지 떨어진 자리가 있죠. 방뎅이 좀 보라구요, 꽁지 떨어진 자리가 없나.
이 세상의 모두가 다 그렇게 거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모습을 마저 벗기 위해서, 끄달리지 않고 마저 벗기 위해서 지금 이렇게 공부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나오기만 하면은 큰 고(苦)든지 작은 고든지 고는 고니까. 만약에 깨달으면 고가 아니지만 깨닫지 못하면 고예요. 항상 고예요. ‘나는 뭐, 고가 될 것도 없어. 그저 모든 걸 주인공에 맡기고 놓고 사니까.’ 이렇게 말들은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진짜로 깨달아 스스로 나올 수가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속상한 일이고 자꾸 끄달리죠.
그런데 한 소식을 얻은 사람들은 금방 일어났다가도 금방 가라앉습니다. 금방 일어났다 금방 그냥 가라앉아 버리고 없어지죠. 그런데 그렇게, 깨달은 거하고 한 소식, 뭐, 한 소식이라는 게 두 소식이 있고 세 소식이 있어서 ‘한 소식’ 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 과정도 우리가 애 적이 있고 젊을 적이 있고 늙을 적이 있듯이, 한 몸이 그렇게 자꾸 변해서 가듯이 마음으로 공부하는 것도 두 소식이 한 소식이고 세 소식이 한 소식이 돼야 됩니다. 그 한 소식마저도 없어서 내세울 게 없어야 열반경지에 이르는 것입니다. 계단 없는 계단을 걸어야 하고 걸을 게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다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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