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하는 자와 대상이 둘이 아닌 것 같아...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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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하는 자와 대상이 둘이 아닌 것 같아...

본문

질문

육조 스님에 따르면 선정을 통한 해탈을 배격하고 자신의 자성을 보는 견성법을 설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것에서 바라보는 자와 바라봐지는 대상으로 나누기 때문에 그것을 아니라고 한 걸로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해하기로는 관하는 자와 대상이 둘이 아닌 고로 둘로 보는 분별하지 않고 관조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관조해 나가는 것이 맞는지요. 또 제가 궁금한 것은 좌선을 통한 깊은 삼매에서 깨달음이 오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생활 속에서 일심이 무심이 되고 무심마저 없는 것을 겪고 깨우침을 얻게 되는지 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둘로 보지 않고 관한다고 했죠? 둘로 보지 않는 게 관하는 겁니다. 관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사물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모든 것을 용도에 따라서 내가 거기에 딱 맡겨놓고 그것을 지켜보는 게 바로 관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엇을 한 가지 연구를 한다, 또는 병고가 났다, 동물이 죽게 됐다 이런 것도 실험하려면, 이거를 한번 한생각 내서 딱 넣어놓고선 지켜볼 때에 그게 관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을 둥글게 해서는 전체 거기다 맡겨 놓고, 자기가 용도에 따라서 할 게 있으면 거기다가 놓고 지켜보는 거예요. 그게 관이에요. 그렇게 해야하지 ‘해 주십시오’가 아니에요. 해달라고 한다면 노예가 돼 버립니다. 자기의 노예가 되지 말고 자기 주인공과 자기와 둘이 아니라는 점, 자유스럽다는 점을 항상 아셔야 합니다. 우리 지금 이런 공부를 하게 된 것도, 부처님께서 바로 자유인이 되라고 하신 거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씨를 심었는데 그 씨가 싹을 틔우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씨는 본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실의 내 마음이 과거의 마음과 동일해 가지고 내가 알아야 되니까 그 싹을 틔워야 하는 거죠. 싹을 틔우기 위해서 생사윤회가 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크고 작은 게 둘이 아닌 찰나생활이 그냥 공했으니까, 공해서 돌아가고 있는 공한 너의 주인공이 그대로 배우는 한마음이요, 한마음은 내려놓는 게 한마음이요, 어떤 걸 이름해서 나라고 할 수 없는 게 공한 것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으려면 촉촉하게 물도 줘야 하고 흙도 골라줘야 거기서 싹이 틔지 않겠습니까? 마른 땅에서 씨가 어떻게 싹을 틔웁니까. 그 과정을 말하는 겁니다. 누구나가 과정 없이 깨달을 수가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화두를 받아 가지고선 글쎄, 자기가 지금 움죽거리고 돌아가고 알고 그러면서도 지식과 학식이 충분히 들어갔는데도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이게 뭣고’하고 10년을 있어봐도 그것은 싹이 트지 않습니다. 싹을 틔우려면 물을 주고 흙을 골라주면서 지켜보는 겁니다. 그래서 싹이 트면 인제 그때부터 기르는 거죠. 과정입니다.

그래서 깨닫는다는 언어마저도 거기다 넣어서는 아니 됩니다. 깨달아야 되겠다는 것도 거기 놔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어떠한 물건이든지 다 용광로에 집어넣는 작업만 한다면, 그냥 그 작업만 하면 돼요, 뒤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 작업만 하면 자동적으로 쇠가 생산이 돼서 나가니까요. 그러고 또 그 뒤의 걱정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 쇠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또 이 세상에 출현을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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