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참나면 보이는 나는 무엇인지...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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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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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참나면 보이는 나는 무엇인지...

본문

질문

일체를 주관하는 주인공이 참나라면 보이는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항상 마음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들고나는 모든 것을 다 그 자리에서 하는데 나는 왜 나와서 이렇게 심부름만 하는가하는 생각도 마찬가지로 항상 마음속에서 맴돕니다. 어리석은 질문인 줄 압니다만 답변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죠. 법당에 올라가면 삼 배를 올리고, 또 급하면 일 배를 올릴 때에 둥글려서 올리고 둥글려서 놓고 나가라 이렇게 말하죠. 그걸 어떻게 들으셨습니까? 여러분이 5년이고 10년이고 다닌다고 그래도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고 다녀요. 법당에 들어가면 저 부처님이 내 모습과 둘이 아닌 것을 아시라고 선법가도 만들어 놓고 그랬는데, 왜 그걸 모르십니까? 내가 진정코 믿는 곳에 딱 집어야 결정이 나는 거지, 딱 집지 않고 어떻게 결정이 납니까?

이게 보이는 데도 여러분이 계시고 보이지 않은 데도 반이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가 더 많다면 많죠. 그런데 그 틈바구니에서 다니면서 어떻게들 사세요? 내 주인공이라는 주장자 하나 가지고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 해 주고, 언짢은 일은 언짢은 일 대로 좋게 펴 주고 이렇게, 지나가다가도 해 주고 살면 얼마나 편안해요? 원수 짓지도 않고 세세생생, 아니 끝간 데 없이 가도 ‘저거 내게 원수야.’ 이러지도 않을 거고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이름해서 부처예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자체가 없는 그 자체가 바로 부처라는 말이에요. 나라는 게 없는 그런 자체가 부처라는 거죠.

알고 보면 하나도 나를 내세울 게 없는 거예요. 나 아닌 나가 있으니까요. 나 아닌 나가 나의 생명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체 만법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일체 화현을 가지고 있구요. 일체 화현의 도리를 가지고 있구요. 그러니까 나라는 자체는 그저 응용하는 대로, 팔이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어 주고, 다리가 들리면 들리는 대로 들어 주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그냥 심부름꾼이에요. 절에서 말한다면 시자라고 그러죠.

그런데 따지고 보세요. 주인을 바깥으로 두었다면 시자 노릇을 다 못 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자기는 시자로서 그 안 보이는 자기 주인의 심부름을 다 하죠. 그래서 모두 안목이 있죠. 예를 들어 ‘아, 이 사람이 정치에 나왔는데 좀 쓸만해.’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좀 가벼워서 안되겠어. 그 값어치는 좀 못돼.’ 이러고 말들을 하거든요. 그러니까 벌써 여러분이 다 도인이에요. 그냥 부처예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지혜로운 납득이, 공법이 되지 않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죠. 우리 먹는 것도 내가 먹는다고 ‘아이, 맛있게 먹었어. 참 잘 먹었네.’ 이러지만요. 그게 내가 먹은 게 아니라요, 모두 자기 역량대로 달라고 그러는 거예요. 이걸 순식간에, 먹으려고 생각을 해 놓고 먹는 게 아니라 반찬이 쭉 있으면 여기서 집어 드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그거부터 집어먹게 되죠. 그래서 여러 가지 이렇게 집어먹게 되면 여기서 소화 기능이 제대로 되는 거죠. 그러면 또 안에서는 좋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잘 먹었다고 그러는 거죠.

그러니까 모두 할 말도 심부름해요. 말도 자기 말이 아니라 모두 거기의 말이에요. 근데 그걸 모르고 살기 때문에 ‘참 귀하구나. 내가 이렇게 귀한 줄은 정말 몰랐구나. 내가 이렇게 귀하게 부모의 은덕으로 몸을 빌어서 받고, 내가 이 귀한 원소 자체를, 자불(自佛)이라는 원소 자체, 그것이 에너지인데 그 에너지를 알았다.’ 그 에너지의 한 방울에 의해서 이 우주의 에너지를 다 같이 할 수가 있는 한 덩어리이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모두 지구에서 살면서 에너지를 우리가 너무 써버려서 이제는 에너지가 없어서 살  수가 없느니 뭐 어쩌느니 하고 그러거든요. 근데 그게 얼른 쉽게 말해서 그렇게 말한다면 못나서 그런 거예요. 보이는 차로만 살지 말고 내가 보이지 않는 운전수로 산다면요, 운전수와 보이는 나와 같이 다니면서, 보이는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보이게끔 돼서 이익을 주고, 또 그 안 보이는 데서는 안 보이게끔 해서 모르는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거죠. 그런데 그 안 보이는 것이 절반 이상 넘는다고 할 수 있으니 보이는 몸과 안 보이는 몸 어떤 것을 더 중요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몸 아닌 몸을 둘 아니게 체득해서 보이는 데서나 안 보이는 데서 다 유용한 심부름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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