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종'과 불교 '시자'의 차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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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종'과 불교 '시자'의 차이?

본문

질문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지만 “불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사물들의 실체를 바라보려고 나름대로 노력 중에 있습니다. 적극적인 신행활동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소리가 “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모든 일에 임할 뿐이다”라는 소리입니다. 그에 대해 문득 궁금해지기를 이 마음공부를 하면서 스님들께 자주 듣게 되는 “나는 주인공의 시자일 뿐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일임한다”라는 가르침과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점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종’ 그리고 ‘주인공의 시자’가 지닌 뜻을 같은 의미로 보아도 되는 건지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인지 질문 올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물감이 열 가지가 있다고 합시다. 열 가지를 한데 모아서 물감이라고 하지만, 이건 비교해서 얘기예요. 열 가지를 통틀어서 물감이라 하지만 색은 전부 다릅니다. 그러니까 때에 따라서는 이 물감을 쓸 수도 있고 저 물감을 쓸 수도 있는데 어떤 것을 쓸 때 물감이라고 하겠느냐는 거죠. 이런 거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자식이 어머니를 만날 땐 자식의 마음으로 어머니를 대하죠? 아내가 남편을 만났을 때는 어때요? 남편을 만나는 마음으로서 대하죠. 동생을 만났을 때는 내가 동생을 만나는 마음으로 형으로서 대하고, 친구를 만났을 때는 친구를 만나는 마음으로 대해요. 그게 바로 나툼이에요. 색은 여러 가지이지만 근본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 근본 하나가 이 색을 쓸 때에 나라고 하겠느냐, 저 색을 쓸 때 나 라고 하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돌아가면서 쓰기 때문에 평등공(平等空)이라고 그래요. 열 가지를 다 쓰지만 어떤 걸 내세울 수 없는 게 물감이라는 거죠. 그래서 어떤 걸 내세울 수 없는 게 보살이라는 겁니다. 자기라고 내세울 수가 없는 게 보살님이죠. 나투어서 돌아가고 있어요. 그러나 바퀴가 굴러가면 심봉은 꿈쩍도 안하고 능력만 줄뿐이죠. 심봉이 움죽거리는 건 아녜요. 바퀴가 구를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지금 나투며 살면서도 고정적인 일 해보셨어요? 이날까지 고정적으로 한 가지만 생각하고, 한 가지만 먹고, 한가지만 말하고 그렇게 살지 않았죠?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인데 다양하게 여러 가지를 먹고,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여러 가지를 활용하고 살고 있는 거죠. 그런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그것이 쪼개져 있는 게 아니라 전체 한데 뭉쳐서 그냥…. 만약에 비교해서 에너지라면 에너지가 그냥 전체 돌아가고 있어요. 그런데 너니 나니 하고 따지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종교가 틀리니 저 종교가 틀리니 하고 따지거든요.

비교해서 이렇게 한번 말해 봅시다. 종지가 있고, 접시가 있고, 대접이 있고, 컵이 있고 차관이 있는데 그 여러 가지 다양한 것이 때에 따라서 다 쓰여지죠. 때에 따라서 다른 용도로 다 필요하죠?

그러니까 사발은 종지를 미워하지도 말고, 업신여기지도 말라는 겁니다. 또 사발은 큰 그릇을 위로 보지도 말라 이거예요. 아무리 자기가 못났다 할지라도 잘난 사람만 못한 게 아니라 잘난 사람보다 못난 내가 더 귀중하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비교해서 또 한 마디 할까요. 엄마가 아무리 못났어도, 코가 언청이라 해도 아마 잘생긴 남의 어머니보다는 내 어머니가 더 소중한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은 자기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고 무르익어서 맛이 나는 거지, 딴 나무에서 무르익은 것은 딴 나무에서 무르익은 거지 내 나무에서 무르익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각자 내가 알아야 해요. 그래서 부처님과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했지 믿으라고 한 게 아닙니다. 똑바로 얘기해서 자신을 믿어라, 각자 내 자신을 믿으라고 한 거죠. 예수님이 만약에 내 자신을 믿으라고 했다면 각자 내 자신이지 그 분을 믿으라는 게 아니죠. 자기 자신을 믿으면 같이 겸해서 들어가는 거니까요. 그러니 부처도 예수도 어느 생명 안 들어간 게 없네요.

그런데 이것저것 마음으로 갈라놓고 또 이것저것 자기 마음으로 지어놓고 구덩이에 빠지기도 하고, 나오려고 울기도 하고, 지금 여기 현상세계에서 지옥, 천당을 다 왔다갔다하죠. 한 생각이 지옥을 만들고, 한 생각이 바로 천당을 만들고, 한 생각 잘못해서 감옥에 갇히고, 한 생각 잘해서 이름이 나고 빛이 나거든요. 그게 다 누가 하는 겁니까? 누가 갖다줘서 하는 겁니까? 또 자기가 갖고 있는 걸 뺏어 갑니까? 그건 어쩔 수 없이 자기가 해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개별적인 자기가 아니라 포괄적인 자기, 참 자기는 무한한 능력을 가졌다 이겁니다. 근데 자기가 자기를 못 믿는 거예요. 잠재해 있는 원소 자체의, 실상의 주인공을 자기는 모르는 거예요. 가톨릭에서도 ‘부(父)와 자(子)가 둘이 아니니라’ 이런 것이 거기 그렇게 있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지금 현재 의식으로써 생각하는 것은 자라고 하고, 잠재해 있는 의식 자체는 능력만 가지고 있는 거기 때문에 그것을 크다 작다 이런 논리가 없어요. 우리가 빼서 쓸 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부로 가면 부로 하나가 되고, 부가 자로 오면 자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몸뚱이는 생리적인 작용으로 인해서 그림자로 따라 다니는 거 뿐이죠. 그래서 기독교에선 종이라고 하고, 불가에서는 현재 자기를 시자라고 하지요. 몸은 시자요, 무(無)의 세계의 자기 정신력은 자기 주장자라고 하기도 하고 ‘자불(自佛)’이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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