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끄시는 방편에 대해...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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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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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끄시는 방편에 대해...

본문

질문

스님의 가르침을 서툴게나마 실천해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겨놓고 굴리다보면 답이 나온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성급한 마음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나투신 모습, 시대, 장소가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스승은 동일하며 한마음 그 자체의 현현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습을 통해서 중생을 이끄실 때는 단체의 형식을 띈 일가를 이루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끄시는 방편에 따라 가풍이 다르고, 법맥을 매우 중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때로는 배타성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법맥을 중시하시는 까닭이 단지 공부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깊은 뜻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아직 모습과 이름에 걸려 있는 마음놀음을 용감히 떨칠 수 있도록 열심히 놓고 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부처님께서 팔만대장경을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그거는 고정되게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그때그때 시절에 따라서 말씀하셨지만 시대가 돌아가는 대로 용어가 다르고 말이 다르게 표현이 돼야죠. 예전에는 달구지에 짐을 실어 날랐지만 지금은 사람도 태우고 물건을 실어 나르는 비행기가 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뜻은 똑같으나 이와 같이 사용하는 용어가 바뀌고 말이 변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알아서 어떻게 해야만이 완성을 하면서 가정도 잘 이끌어 갈 수 있고 또 조상들도 완성을 시킬 수 있고, 자녀들도 완성된 어른으로 키울 수 있을까 하는 거죠. 그러니깐 이거는 일거양득이 아니라 삼거양득이죠. 삼거양득이란 거는 삼심이 일심으로 통하고 돌아가니까 전체를 살린다는 뜻입니다.

옛날에는 현상세계의 법을 먼저 가르쳤고 그 다음에 무의 세계의 법을 가르쳤어요. 그 사람 인생이 다 가도록 그렇게 했단 말입니다. 무의 법을 먼저 가르쳤고 고 다음에 무의 법 유의 법을 같이 가르쳤기 때문에 법화경이 생긴 거라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는 예전대로 그렇게 했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이니까 우리는 단 한순간에 동일하게 그냥 하자는 겁니다. 행주좌와를 그냥 하자 이렇게 생각한 겁니다. 지금은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발전하는 것도 우리 마음에 달린 거지 딴 사람이 하고 가는 거에 기대고 그거를 본따서 갈 게 뭐 있겠습니까? 지금 세상이 빠르면 빠른 대로 가는 거죠.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다르게 말한다고 하지마는 옛날에 달구지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도 달구지라고 해야 옳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말씀해 놓으셨을 겁니다.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계율도 방편도 바꾸라고 말입니다. 꼭 그렇게 말씀하셨으리라고 믿습니다. 지금 돌 하나도 버릴 게 있습니까? 전체가 다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 따로 있고 우리들의 법이 따로 있고, 현재 법이 따로 있고 과거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찻잔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뚝배기에 물도 마시고 차고 마시고 했지만 지금은 아주 보기 좋고 아름답게 만들어서 찻잔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근데 찻잔이라는 이름을 전자에 뚝배기라고 했다고 해서 지금도 뚝배기라고 부르겠습니까?

그러니까 뜻은 다 똑 같아요. 과거나 현실이나 미래나 똑같은데 발전하는 대로 용도와 그 방편이 자꾸 변하는 것이죠. 그래서 갓 낳아놓은 애는 아기라 그러고 조금 자라면 청소년이라 그러고 조금 더 자라면 청년이라고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어른이라고 하고 더 자라면 늙었다고 합니다. 그게 물질이 변하는 대로 이름을 붙이는 거지 처음의 아기를 보고 어떻게 늙었다고 하고 그렇게 이름을 바꿉니까? 변천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이름도 정해지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며 발전이며 물질과학보다도 심성과학으로 발전을 시키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공부입니다. 여러분은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못 보고 태양열이 들어오는 걸 모르죠? 못 보죠? 보지도 못하고 쥘 수도 없고 끌어당길 수도 없죠? 그러나 바탕만 태양열을 받을 장비를 해 놓는다면 태양열이 들어와서 자연적으로 전력으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마음이라는 광대하고 묘한 법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다 이겁니다. 그러나 있기는 있습니다. 절대죠, 아주. 절대 있으니까 그대로 믿고 맡기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법당에 들어가니까 부처가 법당에 있는 거고 내가 변소간에 가면 부처는 바로 변소간에 있는 겁니다. 평등하게 생각하면 부처요, 한 생각 냈다면 법신이요, 또는 한 생각 내서 움죽거리겠다 하면 화신입니다. 그런데 어디 딴 데서 나옵니까?

그래서 진짜로 들어가서 진짜 함이 없이 하라고 말을 했는데 정말이지 그대로 내가 목마르면 얼른 꺼내서 물을 마실 줄 알아야 되는 겁니다. 여기 컵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컵 모양이 어떻게 생겼고 물은 얼마나 담기고 또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다는 걸 아무리 속속들이 잘 안다 하더라도 내가 목이 말라 죽겠는데도 그 물을 갖다가 마실 수가 없다면 무효라는 걸 아시고 하나라도 실천해 가는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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