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나와 대면한 후의 공부과정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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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와 대면한 후의 공부과정

본문

질문

현재의 나와 주인공이 한마음이고 둘이 아님을 체득하게 되는 것은 참나를 깨친 후에라야만 자유인으로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인지요. 깨치기 전의 과정에서 주인공을 절실히 믿고 관하는 과정 중에는 이루어짐(주인공이 다 알아서 하는 것)이 없는 건지요? 둘째는 참나와 대면한 후에 본격적인 공부가 더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것인지요? 더 나아가서 무엇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셋째는 주인공과 내가 만나기까지 걸리는 시간들이 사람마다 다를 것 같은데요,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른가요, 아니면 다른 요인들이 있을까요? 너무 좀 앞서 조급증을 낸 듯합니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허우적거리다 스님 말씀에 눈이 번쩍해서 한참을 읽다가 질문 올립니다. 저도 크게 깨우쳐서 인간으로서의 참도리를 알 수 있는, 한마음으로 모든 이들과 하나가 되고픈 마음에 이렇게 질문드려 봅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예전에 선지식들께서는 좀 미련한 듯한 사람이 공부는 잘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미련하니까 한 길만 파고, 누가 옆에서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도 한 군데로만 파고 들어가거든요, 미련하게요. 그래서 미련한 사람이 더 빠르다 이런 말입니다. 그걸 알려고 한다면 머리가 얼마나 복잡하겠습니까? 내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모르니까 우왕좌왕하다가 보면, 누가 잘한다고 하면 그냥 그것 한번 들어보자 그러고는 그리로 우 몰리고 이러는데, 그게 말 배우러 다니는 거지 공부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래도, 내가 깨우치고 난 뒤에 보면은 그거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깨우치지 못한 체 그냥 자꾸 그렇게 하면 안되죠.

그래서 깨우친 사람은 둘 아닌 공부를 할 수 있어야 되고, 둘 아닌 공부다 하는 것은 천차만별로 거기에 붙어 돌아가는 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육조선사도 둘 아닌 도리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렇게 십여 년이 넘도록 다니셨단 말입니다. 몸은 다녔으되 다닌 사이가 없이 면벽을 하고 다니신 거죠. 바깥 경계를 보면서 안으로 놓고 안으로 놓고 실천하면서 말입니다. 이 세 가지 종류를 다 한꺼번에 하는 거죠.

그러니까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항상 내가 말하듯 ‘주인공, 너가 있다는 것을 너만이 알게 할 수 있어. 증명할 수 있어.’하고 관해야 됩니다. 깨우친 사람에게는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자불하고 상봉할 때, 생각이 안 났을 땐 떨어졌고 생각이 났을 땐 그냥 둘이 아니게 항상 붙어 돌아가게 됩니다. 전기도 내 전력과 저 전력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전부 한 군데서 전력을 쓰게 되고 불이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이게 둘 아닌 도리에서만이 무궁무진한 그런 이치가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깨우치고 난 뒤에 진짜 공부인 것이죠.

그런데 진짜 공부를 하려면 주춧돌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기둥을 올리려면 애당초 이 공부를 시작할 때부터 ‘너만이 너를 이끌어 간다’고 해야 되는 겁니다. 그게 아주 받침이 돼야 됩니다. 여북하면 어떤 선지식들은 "부처님 법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까 "너 나온 자리로 다시 들어가는 게 부처님 법이다." 그러셨다지 않습니까. 그렇게도 말씀을 하셨다고 그러죠. 그런데 그건 말로써 그렇게 하신 게 아니라 그 뜻을 말씀하신 거죠.

우리가 지금 ‘주인공, 너만이 너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하고 관합니다. 왜냐하면 나를 형성시켰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자기이니까, 과거 수억 겁을 내려온 자기이니까 그런 거죠. 깨우친다는 언어도 붙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사용을 못하고 제대로 용(用)을 못하기 때문이죠. 이거 쓸 때 요거 쓰고 요거 쓸 때 이거 쓰고 자유스럽게,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 그렇게, 상황을 봐서 환경에 따라서 잘 그렸으면 특상을 받을 텐데, 그렇지 못하고 저기도 보지도 않고, 저 나무가 퍼런지 저 나무 줄기가 흙빛인지 그것도 보지도 않는 거죠. 자기 멋대로 그냥 갖다 그리는 거나 같다 이겁니다. 그러면 특상은 못 받죠. 그렇지 않을까요? 더불어 같이, 더불어 같이 공해서 돌고 도는 겁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을 하자면, 시시때때로 찰나찰나 환경에 따라서 주어진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용을 하는 거고, 환경에 따라서 우리가 한생각을 내는 거뿐입니다. 그러니 한 가지 색에 착을 두지 말고, 분홍색 따로 착을 두고 빨간색 따로 착을 두지 말고 욕심부리지 말아라 이겁니다. 욕심을 부린다고 해서 한꺼번에 삼십 가지를 다 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찰나찰나 내가 그림을, 갖추어져 있는 환경을, 오관을 통해서 잘 보고선 한 가지를 갖다 쓰고, 요거 다 하고 또 한 가지 갖다 쓰고 하듯이 요량있게 공부해 나갈 수 있어야 유유하고 편리하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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