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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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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이루는 과정

본문

질문

저는 이 생 안에 내 안의 중생들을 조복 받아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가능하다면 스님들처럼 몸 바꿀 준비를 다 해놓고 조용히 앉아서 생을 마감하고픈 보살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희 집 근처의 절에 매일 매일 다니면서 시민선방에 입재하여 몇 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니는 절에 계시는 스님께서 “여자는 일곱 번 죽었다 깨나야 성불하고 남자가 돼야 성불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스님께서는 더욱 정진하라고 아끼는 마음으로 해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정말 그 말씀대로 여자의 몸을 받은 지금의 상태로는 성불을 할 수 없는 것이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여자 남자 모습은 다를지언정 어떻게 마음이 둘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근본 씨는 둘이 아니에요. 동쪽과 서쪽이 둘이 아닐지언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이 둘일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을 깨달으면 사람 눈도 수가 없이, 헤아릴 수가 없이 눈이 많은데 생각이 어찌 한생각뿐이겠느냐 이겁니다. 여자가 남자도 될 수 있고 남자가 여자도 될 수 있고, 한순간에 이것도 될 수 있고 저것도 될 수 있고, 일체 만물이 다 될 수 있는데 남자다 여자다 이렇게 갈라놓고, 성불을 하느니 못하느니 한다면 안되지요.

그렇듯이 우리가, 참 묘한 법이 있어요. 아까 눈이 많다 그랬죠? 모습은 이러한 모습이다 할지라도, 모습은 컵이라 할지라도 이 컵이 별의별 역할을 다 해요. 뜨거운 것도 담았다 찬 것도 담았다, 커피도 담았다 인삼차도 담았다, 별 거를 다 합니다. 근데 모습은 하나인데 그 모습의 분신은 수없이, 여러분이 예수님을 갈망하면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내 줄 수도 있고 또는 부처님을 갈망하는 사람은 부처님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산신을 갈망하는 사람한테는 산신으로도 나툴 수 있고, 또는 용왕을 내가 생각하고 구원을 청하면 용왕으로 나타내 줄 수 있고, 갖은 모습으로 다 여러분 앞에 나투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지 한 모습으로 있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어떤 농부네 집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아버지! 우리가 지금 3대째 가난해서 이렇게 농사를 지어도 먹을 게 없고 이러니 우리 대에는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해 주십시오. 지금 세상에는 자식들에게 농사짓는 것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서울로 보내서 공부를 가르쳐야 하니 이거를 어쩝니까?” 하고 항상 새벽이면 일어나 앉아서 아버지를 부른 거예요. 그랬는데 어느 스님이 하룻밤 묵고 가면서 물었어요. “댁은 뭐 때문에 새벽에 앉아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기도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지마는, 우리가 지금 3대째 이렇게 내려오는데 내가 우리 아버지한테 지금 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손주는 공부를 시켜서 집안을 좀 세우게 해 달라고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매일 그럽니까?” “매일 그렇게 합니다.” “어느 때서부터 이렇게 나왔습니까?” “지금 일 년 팔 개월이 됐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래서 그 스님이 아무 소리 없이 그러냐고 그러고선 갔는데 그렇게 보고 간 게 인연입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묻고 간 게 인연이 돼 가지고, 그 해에 10년 전에 만났던 친구가 잘 돼서 와 가지고선 “얘, 우리 동네 가서 장사라도 하자.”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농사는 작은 동생한테 맡기고선 건어물 도매를 했답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선 큰돈을 벌었어요. 큰돈을 벌어서 자식들 대학원까지 다 가르치고 그렇게 일어나더니 늘그막에 자식들은 서울에서 살게 하고 아우는 아우대로 집을 지어서 내주고 자기가 그 집으로 들어가서 거기다가 큰 집을 짓고선 땅과 논을 사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지금까지도 잘 살고 있답니다. 그런 얘길 들었어요.

그런 거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지극하면 지극한 보람이 있고 자기 한 것만큼은 꼭 있을 겁니다. 또 이런 얘기가 있어요. 옛날에 일본 사람이 회사를 하는데 조선 사람을 데려다가 일을 시키면서 만날 발길로 차고 때리고 이래서 맞고 막 부르트고 그래도 겸손하게 일을 했거든요. 그러다가 일본 사람이 8·15 해방되기 전에 데리고 와서 가르치던 남자한테 그 회사를 맡기고 자기는 큰 회사를 냈어요. 그런데 왜 거저 줬느냐면 세상에 10년이 되도록 때려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이겁니다. 그 보상이 바로 여기 있다, 그러고 준 거예요.

처음엔 지켜보지 않았지만 나중엔 지켜보다 지켜보다, 너무 길게 가다 보면, “아, 이 사람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나.” 하고선 내주는 법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모질고 그렇긴 하지만 보수를 갚는 데 대해서는 아주 끊고 맺는 듯이 갚아요. 그러고 나쁘게 했다 하면 끊고 맺듯이 또 갚습니다. 무서워요, 아주.

사람사람이 누구나가 다 마음을 잘 쓰면, 마음을 잘 쓰면서 믿음을 가지고 망하든 흥하든 그걸 버리지 않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밟히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 착한 사람은 못살고 웬만하게 그저 악한 사람이 더 잘 살더라.” 이런 말들을 보통 합니다. 그런데 착하다 그래서 너무 착한 일만 한답시고 자기 앞에 다가오는 것도 “너 먹어라!” 이렇게 줄 수는 없겠죠. 그러니까 잘하고 못하고를 다 자기 주인공한테 맡겨 놓고서 모든 것을 일임하고 정도에 넘치지 않게 잘 판단을 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 법이자 여러분의 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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