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을 싫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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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여쭤볼 게 한 가지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인간관계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그러는 거 같습니다. 제가 무슨 극우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게끔 제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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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이 세상만사가 다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흐르는 저 물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에서도 천차만별로 생명들의 모습들이 뛰고, 밖에서도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도 보십시오.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살림살이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낮은 걸 보면 낮다고 생각을 하고 높은 걸 보면 높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좀더 넓고 지혜있게 생각을 한다면 낮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거고 높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도 없는 것이니까요.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또 낮은 것이 있으니까 알고 보면 어느 거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가 다 평등한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체 만물만생이 둘이 아닌 도리, 만물만생이 평등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곤충을 보더라도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밟고 돌아서는 거고, 아무 생각 없이 꽃도 꺾어서 버릴 수가 있고, 그것을 꺾으면은 시든다는 거를 생각조차도 못하면서 잠시 그저 자기 생각에만 젖어서 꽃을 마구 꺾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한평생 산다고 해도 흐르는 물과 산이 우리를 본다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얼마나 살다가 간다고 저렇게들 모두 날뛰나’ 하고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삽니까? 곤충이나 작은 벌레들을 보면서 금방금방 죽고 생하고 죽고 생하는 거를 생각을 안 하고, 양면을 생각 안 하고 ‘하루살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렇게 깔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무시하게 되고 그 생명에 대해 무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모든 게 모습은 다르고 길고 짧음이 있을지언정, 길고 짧음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습이 다르고 생명이 짧고 길고는 있을지언정 주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끊임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하루살이가 하루 살다 죽는다고 해서 또 하루살이가 없어지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고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는 것뿐이죠.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고 이런 인연 속에서 거듭거듭 헤매면서 고(苦) 속에서 휘말리고 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한생각 되돌려 공부하다 보면 그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일체 경계를 나온 그 자리에 되돌려 놓는 작업을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정말 열심히 말입니다. 일체 만법을 닥치는 대로 다 하면서 순간순간 되돌려 놓는 작업이 바로 참선에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와선이나 좌선이나 행선이나 입선이나 다 한데 합쳐서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할 건, 참선은 이론적으로 하거나 말로 하거나 지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참 박식해서 요거는 요렇게 푸니까 이해가 되고, 조거는 조렇게 푸니까 이해가 되고 이렇게 하는 분들도 있는데 그건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는 대로 즉시로 집어먹고 집어먹은 즉시 그 맛을 알고 체험하고 들어가야만 참선 아닌 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내 몸이 있는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몸이 움죽거리면 화신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마음이 움죽거리면 법신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잘 아시겠죠?
이렇게 항상 말씀해 드리는 그 뜻은 내가 높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해서 또 처질 것도 없지만,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아님이 하나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억겁을 통해서 진화돼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여기서 금방 한 식구로 살면서 부모로 살다가 자식으로 살다가 형제로 살다가 조카로 살다가 딴 집으로 또 태어나고 그런다면 이거는 도대체 언제 적의 부모이고 언제 적의 자식이며 언제 적의 조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모두가 내 형제, 내 부모 이지 않습니까?
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이렇게 부모형제로 만나 뒤섞여 살아 나왔으니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뒤섞이고 또 뒤섞이면서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항상 그런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몸뚱이도 정맥 동맥을 통해 피가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어찌 정맥에서만 피가 흐르고 동맥에서만 피가 흐른다고 하겠습니까? 온 누리에, 온 누리라는 것은 온몸 손끝 발끝마다 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온 몸을 다 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피가 달라서 어느 피가 정맥의 피라고 하고 어느 피가 동맥의 피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자기로 본다면 자기와 같이만 본다면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의리도 나오고 도의도 나오고, 거기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으로 일체를 싸안는 자비가 향기와 같이 상대에게까지 풍겨서 에너지와 같이 거기에 바로, 우리가 모두 공체로서 공심으로 공용을 하고 있고 공생을 하고 있으니까 내 한 생각의 향기가 거기까지 퍼져서 너와 내가 더불어 웃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가고 옴이 없이 거기까지도 전해져서 다 밝아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현실에서뿐만이 아닙니다. 세세생생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에 살면서 나쁘다 좋다, 싫다 좋다고 생각했던 게 다 죽어서 끊어진다면 별 문제인데 세세생생에 억겁을 거치면서 얽히고설키고, 자기 한 대로 고대로 얽히고설킬 테니 그거를 어떻게 끊으렵니까? 그것이 물질이라면 아예 단번에 끊어버리고 말겠는데 물질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질긴 인연 줄인데, 그 인연 줄은 어떤 걸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온 거는 마음으로 녹일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끊는다고 생각을 한다면은 벌써 둘이 되니까 녹인다고 생각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한 거 자기한테 거기다 다시 놓으면서 ‘주인공! 당신이 해결해!’ 하고 진실로 관하면서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왔던 자리로 다시 집어넣는 거죠. 나온 자리에 돌려놓는다면 다시 들어가서 재생이 돼서 하나가 돼 가지고 만법을 응용하게끔 생동력있게 거기에서 개발돼서 다시 현실에 나오는 건데 실천을 해 보지도 않고 어찌 그냥 생각으로만 된다 안된다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싫어하고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을 지우려면은 한 군데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주처로 인해서 정수 컴퓨터에 입력이 된 거를 다시 입력을 해야 새롭게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상대가 어떻다 저떻다 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자기 주처에다 다시 입력을 해 버려요. 그러면 앞서의 그 모든 것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성과학입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해서 한다면은 진실한 마음의 하달이 전신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권처에서 바로 두뇌로 올라가는 게 누진입니다. 누진으로서 몸의 사대에 하달을 해서 바깥으로 실질적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심성과학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종합 심성과학이기에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잘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고, 일체를 나로 보는 공부를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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