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작정 가는 것이 맞는지...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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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가는 것이 맞는지...

본문

질문

항상 커다란 법문을 내려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모든 것을 놓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놓는다는 생각도 놓으려 합니다. 그러면 사고작용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그냥’입니다. 그런데 그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자성을 느끼기 위해 제가 가는 이 길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요? 계속 이렇게 빛깔도 체도 없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무작정 가는 것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부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사람이 내 몸 하나 던지면,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를 던지면은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길을 걸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길을 어디 끝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또 어디를 허겁지겁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 길은 세세생생 끝없이 걸어갈 길인데 내가 뭘 그렇게 찾아서 어디를 부지런히 가야 하고 또 노비를 빌려서, 노비를 달라고 그래서 내가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남한테 달라 하지도 않고 그냥 가다가 앉으면 앉고 서면 서고 걸으면 걷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아, 내가 고행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안 해도 그대로 고행이며 그대로 참선이구나.’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조리,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 나가는 모든 분들이 다 완성을 하라는 건 내 욕심이지만은 그래도 다 하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도리는 일심으로 정진을 해야 하거든요. 소멸시키는 실천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거예요. 소멸시키는 실천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은 붙이지도 않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는 여러분처럼 아주 지식이 많고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길이 없는 길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한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길을 알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물에 가면 주해신이 됩니다. 모든 걸 자유스럽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주해신이 된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먼저 하거든요.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름이 뭐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실천이 중요하지. 그래서 천차만별의 마음은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지, 부처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마음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딪치면 아프고 또 좋고 나쁜 걸 다 뻔히 아시죠? 그러니까 아시는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대로 행하면서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내 몸이 하는 거, 먹는 거, 말하는 거, 사는 거 몽땅 한자리에다 맡겨 놓고 사시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렇게만 믿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다 없어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겁니다. 정말입니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그러셨겠습니까. “허허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인데, 배는 네 모습이고 배 속에 있는 생명들은 네 중생이니라. 그런데 그 배를 이끌고 가는 선장한테다 진짜로 믿고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선장이 다 알아서 가는 데까지 끌어다 줄 것을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하면서 바깥으로 찾고 온통 난리를 치니까 그 배는 뒤집힐 수밖엔 없다.” 이거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는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허공 길의 공부입니다. 우리가 저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승의 이치를 다 알아서 대치를 해 나가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덟 달 만인가 일곱 달 만에 애를 낳아서 다 죽게 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가 또 몇 대 손이랍니다. 몇 대까지 손이 없었대요. 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런데 그 부모가 이 공부를 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급하니까 지극하게 오직 그거 하나로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급하게 자기 앞에 떨어져야만 그렇게 야단법석을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지금 허허바다에 배 한 쪽 타고 가는 형국이거든요.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렇게 아슬아슬해요. 어느 때 차 사고가 날는지, 어느 때 떨어질는지, 어느 때 또 잘못될는지, 어느 때 식구가 어떻게 될는지 그것도 모르구요. 그냥 허허바다에 떠서 가는 형국인데 이 공부 안 하고 그냥 살아서 되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내 수중에 아무것도, 내 수중이 아니라 내 몸까지 없어요. 아주 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어요.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다구요.



여러분이 함이 없이 살고 공해서 내가 따로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너무 많아서 고정됨이 없이 그냥 항상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만나고 또 만나고, 하고 또 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돈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망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전부.



그렇게 없는 걸 알아야 내가 아주 자유스럽고, 집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가족이 다 죽는다고 해도 앉은 자리에 그냥 뻔뻔하게 앉아 있을 거예요,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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