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붙을 사이가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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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병고나 업보에 의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여쭈면 스님께서는 고가 붙을 사이가 없기에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분명히 고통이 있고 병고가 있는데 고가 붙을 사이가 없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고(苦)·집(集)·멸(滅)·도(道)’ 사제법을 말하는데, 우리가 고라고 이름을 붙여 놓고 고라고 하니까 고인 것이지, 고가 있다면 어떤 것이 고인지 내놔 보십시오. 집착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집착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고요.
‘남을 한 번 때렸으면 너도 한 번 맞는다.’ 이것을 바로 인과응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라고 이름 붙이기 이전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점이 있지 않은가 이렇게 봅니다. ‘한 번 때렸으면 한 번 맞는다’ 할 때, ‘아하! 때린 것도 나고, 내가 때렸기 때문에 바로 내가 맞은 것이다.’ 이럴 때는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한 번 때려 보고 한 번 맞아 보니까,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게 되고 자기를 한번 생각해 보게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수행 과정이라고 생각할 때 거기에는 업보가 붙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에 있는 사생의 문제가, 천차만별로 들어 있는 문제가 인연 따라서 모인 겁니다. 내가 만약에 깡통의 마음을 썼다면 깡통의 마음 차원을 가진 것끼리 인연이 됐을 거고, 내가 금의 차원이라면 금끼리 모여서 이 몸이 됐을 거고, 천차만별로 돼 있는 마음의 차원에 따라서 인연을 지어서 이렇게 모인 겁니다. 여러분! 무쇠 쪼가리를 주워다가 금방에 갖다 놓지는 않으시겠죠? 금을 무쇠전에 갖다 놓지는 않으실 테고 말입니다. 보석을 넝마전에 갖다 놓지 않고 넝마를 보석전에 갖다 놓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것이 바로 각자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끼리끼리들 인연 따라 모여서 우리 이 몸이 생기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다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져서, 수십억 마리가 들끓다가 하나의 지도자만 남기고서는 다 없어지고 바로 대장으로 뽑힌 그 물질 하나에 동일하게 같이해 줍니다. 그러면 임신이 되는데, 그 어린애가 자라는 대로 피를 따라서, 모든 것이 인연 따라서, 그 사람의 차원대로 같이 하나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자라는 대로 사생은 또 들어가는데 인연 따라서 차원대로 가서 같이 생기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이 인과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업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없지만 그걸 구태여 업보다, 인과다, 고다, 이런 이름을 붙이지 말라 이런 소립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런 인과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식이 태어나면 태어나는 대로 끼리끼리 모이는 겁니다. 내가 금이라면 바로 금의 인연으로 모일 것이고, 또 무쇠라면 무쇠의 인연을 가지고 자식이 태어나거든요. 본인이 무쇠기 때문에 무쇠의 인연이 오는 거죠. 금이라면 금이 올 테구요. 그래서 무쇠나 깡통이 서로 부딪치면 시끄러운 소리가 나듯이, 한집안 가족이 서로 괴로움을 주고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또 인간뿐만 아니라 짐승들도 그렇고 벌레들도 그렇고, 화생이든지 습생이든지 태생이든지, 모든 게 다들 쫓고 쫓으며 잡아먹고 잡아먹히면서 피를 흘리며 서로가 부딪치고 우는 이러한 것이 아마 진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모두가 더하고 덜함도 없는 겁니다. 벌레의 세계는 벌레의 세계대로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고 그렇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고요. 우리 인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각박하고 조금도 여유가 없는 인생살이 같습니다. 또 인생살이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한번 대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넝마라고 해서 넝마대로 고정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인과다 업보다 그런 말을 붙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지금 넝마라고 해서 계속 넝마로 그냥 있지 않고 재생하는 대로 딴 모습을 해 가지고 나오고, 역시 무쇠도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죠. 만약에 아궁이 뚜껑이 됐다면 아궁이 뚜껑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딴 걸로 모습을 해 가지고 또다시 나옵니다, 재생이 돼서 말입니다. 인간도 역시 요 모습으로만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나투면서 화해서 돌아갑니다. 이 이치를 우리가 진리라고 하는 거죠.
그렇다면 업보가 없다는 생각과 있다는 생각 중에 어떤 것이 틀리고 어떤 것이 맞을까요? 우리가 ‘업보가 없다’ 해도 틀리고 ‘있다’ 해도 틀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인데 마음 내는 거는 천차만별입니다. 만약에 천차만별로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고가 있고 고정됨이 있겠지마는, 우리가 천차만별로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고도 인과도 업보도 거기 붙을 자리가 없다 이 소립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살면서 고정관념도 없고 고정되게 보는 것도 없고, 고정되게 듣는 것도 없고, 말하는 거, 만나는 거, 오고 가는 거, 먹는 거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그거를 공(空)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거 될 때에 나라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날 때 내가 만났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는 존재를 세울 게 없는 것이 바로 진리며, 부처요 법신(法身) 화신(化身)이며, 이런 것이 종합돼서 삼위일체로 회전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살림살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잠재의식 카세트에 과거에 수억겁을 거치는 동안 모습을 바꿔 가면서 화해서 살던 얽히고설킨 그 습이 모두 감겨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현재 짊어지고 있다 이 소립니다. 그렇다면 거기서 각본대로 카세트에서 솔솔 풀려서 나오는 것을 여러분이 팔자 운명이라고 아는 거죠. 그러나 그것은 팔자 운명이 아니라 자기가 한 대로 나오는 그것들을 통해서 스스로 느끼고 알고 성숙하게 하기 위해, 나의 근본 주처인 참나가 현재 나를 다지고 다져서 가르치고 이끌어 오는 거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자리에는 업보도 붙지 않고 아무것도 붙지 않습니다. 내가 공해서 건덕지가 없는데, 모두가 공해서 건덕지가 없는데 그 공한 자리에 붙을 게 뭐가 있습니까? 붙을 건덕지가 어딨으며 기댈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이 의심나걸랑 마음을 내놔 보십시오. 마음이 있다면 내놔 보시란 말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달린 거지 마음자리에는 붙고 떼고 할 게 없습니다.
그러니 카세트에서 각본대로 나오는 그 자체에다 다시 새로운 것을 녹음시킨다면, 수억겁 동안 감겨 있던 입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계속 바꾸어 넣는다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채우면 없어지고 없어지면 채워지는 그런 빈 그릇이 될 것입니다. 채워졌다 해도 틀리고 또 비웠다 해도 틀리니, 채워지면서 비워지고 비워지면서 채워지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우리가 여여하게 지금 놓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각본대로 나오는 그 모든 것을 카세트에다 되놓는다면 여러분이 수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쌓아 온 습을 다 놓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남의 마음을 아프게 했든 소 잡는 백정 노릇을 했든 무엇을 했든지 어떠한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그렇게 놓고 돌아간다면 그 업보는 지옥고라도 다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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