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발현해야 하는 이유는?
본문
질문
불경(佛經)에서 말하는 견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요. 주인공이 발현되어 내면의 이끎을 받는 그 자체가 견성인지, 아니면 주인공의 이끎을 받아 올바르게 수행하는 결과적 현상으로 견성을 이룰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견성을 하였다는 스님들의 행적이나 어록, 또는 경전에서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 스님들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는데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이야기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그런 내면의 이끎이 없었던 것인지요. 없었다면 그 스님들이 말하는 견성은 무엇이며, 내면의 이끎이 없이도 견성할 수 있다면 주인공을 발현시켜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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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질문을 참 잘했는데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왜냐 하면 경전에 담겨있는 내용을 파악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알아 경전을 통달한 것하고, 내 마음을 깨달아 증득한 것하고는 다릅니다. 경전의 말씀을 고대로 터득한 사람은 말을 유창하게 하고 모든 것을 다 유창하게 잘합니다. 다 잘하는데, 결정적인 문제에 가서는 해결을 못하는 겁니다.
예전에 경을 아주 통달한 어느 큰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을 전체 위로 꿰고 바로 꿰고 했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는 것을 어찌할 바가 없더라.” 이러셨어요. 그러고는 단식을 하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도리와 경과 선과 교가 둘이 아니게끔 된 것은 다 모두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구랑신이 내려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손이 있어서 이사를 못 간다든가, 터가 나빠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산소 자리가 나빠서 못 쓴다든가 이런 문제가 닥칠 때는 어찌해볼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일이 생기면 꼭 당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법의 능력이, 나와 나 자체가 상봉을 했다면 그땐 선과 교가 둘이 아니에요. 일체 모두가 둘이 아니고 그대로 자유스러워지는 겁니다. 그대로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엄청난 차이가 난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남한테 화두를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세상이 벌어졌지, 내가 없는데 무슨 종교가 있고 부처가 있고 세상이 있느냐 이거예요. 그러니 나부터 알아라 이거죠.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알라’고 그랬어요. 너부터 믿으라고 그랬고요.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렇게 했다지 않습니까. 병자도 많은데, 예전에 고치지 못하고 막 쓰러지는 병이 동네에 발생을 하니까 도대체 그냥 앞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이거예요. 물러서서 생각을 하니까, 내가 이날까지 이론적으로는 다 배우고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니깐 이렇게 어렵더라 하고는, ‘그냥 나 하나 버리면 되지.’ 하면서 그냥 거기에 들어섰어요. 그러니 나 하나가 문제입니다. 나 하나 버리면 아무것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겁니다.
지금 살아가는 것도 고정됨이 하나도 없습니다. 변하고 부서지고 그러니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게 바로 그대로 공했다고 하는 거예요, 그대로 말입니다. 그대로 공했기 때문에 내 몸도 그대로 있지 않고 공해서 돌아가요. 고정되게 그냥 있지 않은 겁니다. 말하는 거나 가고 오는 거나 만나는 거나 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이름을 가졌을 때 내가 그 이름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언니라는 이름, 오빠라는 이름, 형이라는 이름, 아우라는 이름, 또 장가들고 시집가면 며느리라는 이름, 사위라는 이름, 또는 아내라는 이름, 남편이라는 이름, 어머니라는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 뭐, 천차만별로 이름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어떤 이름을 따라서, 아버지 노릇 할 때에 나라고 할까요, 남편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아들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그러니깐 전부 공했단 말입니다. 나라는 게 없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그 도리를 알면, 없다 하는 걸 알면 죽는 것이다 이 소리예요. 모두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고, 그러니깐 모든 것은 고놈이 한다는 것을 알고 또 믿으라는 겁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하죠. ‘모든 일체를 다 거기서 하는 거니까 고놈이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고놈이 있다는 것은 고놈이 증명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으라고 하죠. 그래서 나를 내가 발견해서, 과거의 내 조상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나를 끌고 온 나를, 진화시킨 그 장본인을 말입니다. 그래서 둘이 아니게 부와 자가 상봉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한마음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무조건 거기다 놔야 된다, 맡겨야 된다 하는 겁니다. 무조건 맡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이, 화살을 쏘는데 똑바로 탁 들어가 맞아야 되는데 화살이 이리로 가서 맞고 저리로 가서 맞는다면 어떻게 그게 되나요? 전체 원을 해 놓고선 중심을 그냥 꿰뚫는 건데, 꿰뚫는 공부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뭣고? 이럭하는 놈이 뭘꼬?’ 이런다면 10년 20년이 가도 어려워요. ‘이놈이 모두 집어 먹고 가는 놈이로구나.’ 그러고 내놓는 놈이고 들여놓는 놈이고 ‘들여놓고 내놓는 거를 다 하는 놈이로구나.’ 하고 그대로 그냥 인정하고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빠르다 이겁니다. 아, 그놈이 하는 건데 왜 인정을 안 하느냔 말이에요. 왜 믿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그리곤 ‘이뭣고?’ 하느냐 이 소리예요. 자기가 그대로 해가면서, 지금 들이고 내고 해 가면서 왜 인정을 안 하느냐는 겁니다.
석존이 여기 계시다 하더라도 석존이 깨달은 거지 내가 깨달은 건 아닙니다, 각자. 만약에 나 자신을 모른다면 내 주장자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러기 때문에 못났든 잘났든 제일 가까운 것이 자기와 자기입니다. 자기를 깨달아야 석존의 마음도 역대 조사들의 마음도 중생들의 마음도 풀 한 포기의 마음도 같이, 같이 공존하고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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