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앉을 자리가 없다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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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에 보면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고 신수대사가 말씀을 하셨는데, 육조대사께서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 있으리오. 마음은 보리의 나무요, 몸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라. 밝은 거울은 본래 깨끗하거니 어느 곳이 티끌과 먼지에 물들리오.”라고 답하셨습니다. 스님께서도 프로펠러 돌아가듯 공한 자리이기에 먼지 앉을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진정 왜 그런 것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원래 청정한 그 자리는 죄도 없고 업보도 없고 유전도 붙을 자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수억겁을 살아오면서 차원이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얼마나 업을 많이 짓고 나왔겠습니까? 우리가 지금도 장창 이 도리를 모르고 가면 자기가 한 대로 자기 차원대로 자기한테 오는 겁니다. 그거는 독 안에 들어도 면치 못하고 피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에서 벗어날 수 없느니라.’ 이랬습니다.
그런데 왜 ‘고는 없다’라고 한마디로 말했겠습니까? 고 하나만 알면 고(苦)·집(集)·멸(滅)·도(道)가 다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왜냐. 내가 줄창 말씀드리듯이 이열치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것도 못 알아들으신다면, 과거에 살아왔던 거를 카세트에다 녹음했다고 합시다. 그럼 카세트를 짊어지고 나온 거죠? 그 짊어지고 나온 카세트 테이프에 감겨 있는데다가 새로운 녹음을 하니까, 나오는 자리에다 다시 넣으니까 자꾸 넣는 대로 앞서 녹음되었던 과거의 업보는 다 무너지고 맙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다못해 카세트로까지 비유를 했습니다. 지금 새로 넣으면 앞서 넣은 것은 없어진다, 또 새로 넣으면 그게 또 없어진다. 이러니까 업보가 붙을 틈이 없어요. 그래서 예전에 신수대사가 ‘갈고 닦아야 한다.’ 이랬는데, 육조선사는 ‘먼지 앉을 틈이 없는데 어째서 닦고 갈아야 되느냐.’ 하고 그냥 한 마디로 말한 겁니다.
그런 것과 같이 진리를 가만히 고찰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평생을 산다 하더라도 한 철입니다, 한 철!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나날이 살아가는 게 한 찰나 생활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여러분이 친구를 만날 때는 자동적으로 세 가지가 포함돼서 나갑니다. 말도 뜻도 행도 그냥 친구로서 나갑니다. 근데 그 친구와 헤어지고는 자식을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금방 아버지가 됐죠? 누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게 아닙니다. 자동적입니다. “얘, 너 어디 갔다 오니?” 이렇게 말이 나가죠? 생각과 뜻도 그렇게 나가죠? 행도 그렇게 나가죠? “너 배고프지 않으냐?” 할 수도 있고 “집으로 어서 가자.” 이럴 수도 있고, 그렇게 자동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또, 집에 들어가서 부모를 만나 보세요, 어떻게 되나. 아버지는 또 그냥 없어지고선 금방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하면 어머니가 “아유, 이제 들어오니?” 이렇게 응대해 주시죠. 그런데 자동적이 아닙니까? 아내를 만나니까 또 금방 자동적으로 남편이 됐습니다.
염주알 돌리는 것처럼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역할을 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의 내가 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를 만났을 때입니까, 자식을 만났을 때입니까, 친구를 만났을 때입니까, 아내를 만났을 때입니까?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공했다고 했습니다. ‘공했다. 공했느니라. 비행기 프로펠러 돌아가듯 그렇게 돌아가는데 무슨 먼지 앉을 자리가 있고, 업보가 붙을 자리가 있고, 지옥이 있겠는가 이겁니다. 안되는 것도 찰나요, 되는 것도 찰나니, 되는 거 안되는 거를 다, 거기서 나오는 거 거기다 맡겨 놓아라. 맡겨 놓으면 거기에서 그대로 자유스럽게 사용해도 그대로 여여하니라. 그것이 바로 법이니라.’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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