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자리를 마음껏 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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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으면서 마치 허공과 같이 꽉차서 공한 그 자리, 바로 모습 없는 나의 참나가 세상 모든 것을 들이고 낸다는 것을 사무치게 느껴도 보고, 울어도 보지만 여전히 우매한 중생인 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모습과 이름을 붙들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정말 죽어서, 항상 둘이 아닌 내 본래 자리를 마음껏 쓸 수 있을런지요?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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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공부하는 사람들이 빨리 깨우쳐야겠다고 하는 그것 또한 착이기 때문에 빨리 깨우쳐야겠다는 생각까지도 놓고 그대로 자기 자신을 믿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합니다. 빨리 깨우치고 싶어 하는 것도 욕심이에요. 내가 항상 말을 하듯이 그런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이 있다면 그것을 밀고 나가고, 자신이 없다면 밀고 나가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요기밖엔 못 디뎠는데 나중에는 저기 먼 데까지 딛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가 넓어져서요. 차츰차츰 뛰어야 되는 거지 한꺼번에 뛰려면 안 되니까 조그만 거부터 체험을 해나가시라는 겁니다. 열심히 하나 하나 체험을 해나가시다 보면 사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또는 세계적으로도 만반의 준비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떨 때 여러분을 보면 오관을 통해서 지금 오신통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100% 활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유위법만 활용을 하지 무위법은 활용을 못하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으로 인해서 눈으로 보고 듣고 하는 것을 욕심 없이, 내가 한다는 생각 없이 해야만이 된다는 것이죠. 습이라는 게 참 무섭습니다. 선한 일을 했어도 내가 한 일이 아니요, 악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대의적인 일을 위해서 했다면 악한 일이 아닙니다. 거짓말도 남을 위해서 방편으로 했다면 잠시 거짓으로 한 거죠.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잘 생각해서 남을 이익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타인의 육신이나 내 육신이나 똑같은 중생이란 말입니다. 자기 중생을 자기가 이익하게 만들 수 있어야 남을 이익되게 할 수 있죠. 그러므로 잘 생각해 봐야 할 점입니다.
그러니 깨달아야만 한다는 그 관념에 머물러서 얼마쯤이나 더 가야 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생활 속에서 하나 하나 체험을 해가면서 턱턱 밀고 나가보세요. 의심을 하거나 걱정하지 말고요. 그렇게 밀고 나가다 보면 점점 감응이 와서 느끼게 됩니다. 점점 점점 점점 아주 굳어지는 겁니다. 굳어지는 반면에 큰 일도 할 수 있는 거구요. 나라에 위기에 온다 할지라도 그걸 밀치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자신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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