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성 법성 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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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불교학을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경전에 불성과 법성, 그다음에 무에 대해서 나오는데 법성과 불성과 무와의 차이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무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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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무(無)라는 것은 일체만물이 모두가 고정됨이 없이, 여러분이 이 사람 만날 때 저 사람 만날 때 고정됨이 없이 바뀌어 돌아가듯이 가고 옴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대(對)가 없는 게 무죠.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누구든지 어떤 걸 만날 때 어떤 걸 볼 때 내가 봤다고 할 수 없는 게 무다 이거예요. 그게 무심이다 이겁니다. 이 세상을 통틀어 봐도 우주 전체가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기 때문에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무!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 무!
불성이라는 것은 그대로 저 풀 한 포기도 남김없이 전체 시공이 없이 돌아가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불성은 누구나가 다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내는 것은 법성이고 본래 가지고 있는 거는 불성이다 이겁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거는 무다 이거죠. 이것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끝없는 진리,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리, 찰나찰나 나투는 도리 이것이 한데 합쳐지면 그것이 무입니다. 어떤 걸 나라고 세울 수가 없어요. 내가 제일이라고 세울 수가 없어요. 그것이 무다 이겁니다.
우리가 생각을 내지 않으면 몸뚱이가 움죽거릴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바로 내가 지금 일을 하고 있고 약속을 했으니까 빨리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만이 내 몸이 움죽거리고 가거든요. 그래서 법성이다 이겁니다. 불성은 또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법성은 사람이 아무 생각이 없을 때는 무로 전체가 같이 돌아가지만 한 생각을 냈을 때는 법성이죠. 한 생각을 냈을 때.
그래서 무 법 불, 이것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돌아가는 거조차도 무다 이거죠. 하나로 돌아가는 거. 보는 것도 오늘 여러 사람 봤죠. 고정됨이 없어요. 듣는 것들도. 그러니까 모든 게 무예요. 찰나찰나 돌아가니까 무. 찰나의 무. 찰나 생활이거든요. 시공을 초월해서 찰나 생활이기 때문에 무예요, 전체가. 불 법 승 전체 무다 이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무의 세계에 유의 세계를 같이 거둬지고 100%를 찰나찰나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이 길을 인도하는 거다 이겁니다.
그래서 자세히 얘기를 하자면 무라는 이치는 우리가 끊임없이 찰나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본래 여여하게. 여러분의 불성이 본래 있고 마음을 내는 법성이 그대로 있고 움죽거리는 생활이 그대로 있다 이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있기 때문에 그대로 찰나찰나 자기가 보는 것도 하나만 고정되게 보는 게 없고, 만나는 것도 고정되게 한 사람만 만나는 게 없고, 먹는 것도 한 가지만 먹는 게 없고 또는 만나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한마디만 고정되게 하는 게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된 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찰나찰나 이렇게 돌아가는 거죠. 여러분이 애가 “아빠!” 하고 들어왔을 때 금방 아버지가 되고, 부인을 만났을 때 금방 남편이 되고, 부모를 만났을 땐 금방 자식이 돼요. 이렇게 화해서 돌아가는 것이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바로 무(無)라고 했던 거예요. 깨닫지 않고는 참 어려운 문제죠.
지금 저기 물이 흘러 돌고 있습니다. 물이 흘러 돌고 있는데 끊임없습니다. 그 물은 여기서 흐르나 저기서 흐르나 똑같이 흘러서 제자리로 항상 모입니다. 또 위로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그 물을 만약에 산으로 비유한다면 높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있습니다. 높은 산이 있기 때문에 낮은 산이 있고 낮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흘러 도는 이 자체가 바로 우리가 무의 세계, 유의 세계와 같이 우리가 죽어서 그냥 없어지는 게 아니라 우린 항상 살아 있는 겁니다. 저 물이 흘러서 돌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항상 나무뿌리가 살아 있는 그거는 설명을 해서 아는 게 아닙니다. 항상 여러분은 그냥 저 물이 흘러 돌듯이 도는 거, 산이 높고 낮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낮은 게 있기 때문에 높은 게 있고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낮은 게 있는 것이지, 어떻게 낮은 게 없는데 높아 보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평등하게 돌아가는 것을, 찰나찰나 돌아가는 것을, 흘러가는 물이 끊어짐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무’라고 한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만약에 나를 증득해서 내가 낳기 이전을 발견해서 물리가 터지고 지혜가 생기고 모든 걸 통달한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다 없는 것이죠. 이것이 무예요. 왜 없다고 하느냐. 번연히 이렇게 앉았는데 왜 없다고 하느냐. 여러분의 근본 자체는 영원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겁니다. 근본 자체가 살아 있고 근본 자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마음을 낼 수 있고 마음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움죽거릴 수 있고 이렇게 돌아가는 것이 그대로 다 무다. 그래서 이거를 통달하기 전에는 모른다 이겁니다, 모두. 내가 나기 이전과 나와 결부돼서 깨달아야만이 그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거는 경설로 할 수도 없고, 정법이 어떤 것이고 사법이 어떤 것이고, 이것이고 저것이고 이렇게 따진다면 여러분이 각자 나를 깨달을 수가 없어요.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이 계시니까 여러분 마음속에서 마음을 내고 바깥으로 움죽거리고 이러시죠? 만약에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런 관계상 고정된 게 없이 돌아가는 이 자체 진리가 공했다 이 소립니다. 이거를 알아들으려면, 이거를 알려면 깨달아야만 안다 이겁니다. 그거는 말을 해 가지고 아는 게 아니니까. 이게 그 법이에요. 그게 법이에요. 무도 되고 법성도 되고 불성도 되고, 불성이 없으면 그렇게 받을 수가 없고 먹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가르쳐 줘도 모르는 것은, 깨닫지 못해서 모르는 거야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나를 발견하고 내가 낳기 이전 과거의 나를 발견해야만이 현재의 모든 걸 똑똑히 보고 모든 걸 똑똑히 처리하고 똑똑히 이 내 몸속에 있는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고 일체제불과 한마음이 돼서 한마음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이거죠. 일체제불의 마음은 내 한마음이요, 일체제불의 법은 내 한마음의 법이고 생활이고, 그렇지 않아요? 악행을 저지르는 것도 선행을 저지르는 것도 내 한마음입니다. 부처 마음이 따로 있고 중생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부처 중생은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높고 낮음도 둘이 아니요, 동서가 둘이 아니요, 여자 남자가 둘이 아니요, 일체 중생이 둘이 아니다 이거예요. 이렇게 둘이 아닌 도리를 알려면 나를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그 도리를 증득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증득하고 나를 발견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그 도리를 환하게 통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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