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생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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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운전을 하고 가다 보면 닭이나 돼지가 트럭에 실려서 어디론가 끌려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마음을 낸다고는 하지만 꼭 우리가 이렇듯 낮은 차원의 동식물의 목숨을 죽여서 남의 살을 먹고 살아야만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렇지 않은 듯 즐겁게 내 몸을 위해서 그것들을 취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보면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많이 듭니다. 그럴 때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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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강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습니다. 만약에 ‘살생을 하지 마라’ 하는 말씀대로 한다면 그것은 아주 무지하게 살생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어부들이 아니더라도 수없이 잡아서 먹고 삽니다. 우리가 뭐는 안 먹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살생을 하지 마라’ 하는 것은 그런 살생이 아니라 좀 차원 높은 ‘살생을 하지 마라’ 하는 얘기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내 몸과 같고 내 생명과 같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죽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내 생명과 같고 내 몸과 같이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만약에 억겁을 거쳐서 우리가 진화되고 창조되고 하는 이러한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전부 살생이지만, 만약에 고기들을 어부들이 그렇게 잡지 않는다면 그 고기 모습으로서 한 백 년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잡아 줘야 그 모습을 벗는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어야 할 사람은 먹어야 하지만 아직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먹지 마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한 쪽은 살생이 되고 다른 한 쪽은 무주상 보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게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말입니까. 가난하게 사는 사람에게 돈을 한 주먹 준다 하더라도, 쌀을 사 준다 하더라도 그건 임시방편입니다. 한생각을 해 줄 수 있는 그 능력으로서 무주상 보시를 해야만이 억겁을 거쳐 오면서 진화돼서 굴러오면서 업을 짓고 유전을 짓고, 끄달리고 얽히고설킨 그 업보를 다 면제시켜 줄 수 있는 그런 한생각을 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은 뿌리를 없애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자기 마음 가운데 창살이 없으니 그냥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생긴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살생하지 마라’ 하는 것은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지 마라’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하는 것도 아닌 도리를 알아야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살생을 아무리 안 한다고 하더라도 살생을 하게 됩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리죠? 소를 한 마리를 다 먹는다 하더라도 그거는 먹는 사이가 없이 먹어야 양면이 다 산다 이겁니다. 왜냐! 부모를 위하든지 자식을 위해서 어떤 걸 죽인다 하더라도 그 무명을 벗겨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그 도리를 알아서 그 무명을 벗겨 주고 인간으로서 화현을 하게끔 하고 무명을, 묶여 있던 거를 벗겨 줄 수 있어야 된다 이겁니다. 벗겨 주면 그 살은 약이 되니까 양면이 다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고기가 고기로 보이는 사람은 그것을 못 먹고, 고기가 고기로 보이지 않고 내 살과 같이 보인다면 바로 그것은 무명이 벗겨지는 겁니다.
그리고 이 체(體)는 약이 되지만 그 영혼은 체가 없는 거니까 바로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 내 마음에다가 넣고 굴리면 모든 게 금방 ‘나’가 됩니다, 금방. 금방 한 찰나에 ‘나’가 됩니다. 닭이나 돼지나 개나 모든 생명이 말입니다. 어떤 생명을 취해서 다른 생명이 살아야 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나 그것을 취할 때의 내 마음은 그것을 항상 ‘나’와 둘 아니게 볼 수 있는 참된 마음이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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