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된 삶 속에서 벗어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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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는 가족이나 직장, 학교나 종교 같은 관계 속에서 그 틀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울고 웃고 속고 속이는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야만 합니다. 스님, 꼭 그와 같은 구속되고 구차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야만 하는지요? 창살 없는 감옥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는 스님 말씀이 이러한 구속되어진 틀을 벗어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저의 생각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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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예전에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하도 배가 고프고 쓰러질 것 같으니까 어느 집에 가서 문을 두들기면서 구원을 청했답니다. 그랬는데 그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이 어떤 미친 놈이 와서 이러느냐!” 고 그러면서 발길로 차고는 문을 탁 잠그고 들어갔단 말입니다. 그렇게 발길에 차여서 그 사람이 나동그라졌는데, 생각을 해 보세요. 그랬을 때 자기를 발길로 찬 사람을 얼마나 원망을 하겠어요? 근데 그 사람은 자기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자기가 여기 와서 문을 두들기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이 나와서 나를 발길로 찰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고요. 그럼 그 사람이 나쁜 게 아니죠. 바로 자기가 원인인 거예요.
그렇다면 부부지간으로 살아도 그런 건데 어떻게 해서 구속이 되나요? 자기도 모르게 생각을 하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기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이 누구냐는 얘기죠. 그 장본인이 다 하는 거죠. 그 장본인으로 하여금 내가 형성이 됐으니까 바로 나의 탓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원망할 것도 없고, 왜 내가 발목이 잡혀서 이러나 하는 생각 할 것도 없다 이겁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이 생기는 겁니다. 내가 그런 생각을 안 하면 모든 게 허공과 같은데 말입니다. 이 우주천하가 다, 이 생명체가, 일체 유생 무생이 다 한꺼번에 돌아가는데, 거기에 나도 껴서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 어째서 내가 구속이냐 이거예요. 그건 생각으로서 구속을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구속되게 공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 몸뚱이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를 볼 때도 몸뚱이로만 보거든요. 색으로만 본다 이 소립니다. 색으로만 보니까 그렇죠.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은 항상 어디고 서로 도와가면서 살지 그렇게 안 살아요. 뭐 편견을 가지고 살지 않아요. 왜 그러냐. 모두가 나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에요. 내 생명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아픔 아님이 하나도 없고, 내 자리 아님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은 아주 평탄하게 살고 있어요. 항상 얘기하듯이, 물도 나요, 나의 생명이요, 흙도 나의 생명이요, 바람도 나의 생명이요, 공기도 나의 생명이요, 모든 일체 유생 무생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니 어찌 나 아님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생각할 때 생각 내는 것도 그 근원지에서 나오는데, 하나의 근원지에서 나오는데 어찌 잘못됐다 잘했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왜 당신은 잘 알면서 남한테 속임을 당합니까?’ 이러시겠죠. 그건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속임을 자기가 당하는 거지, 나를 속이는 게 아니다 이겁니다. 왜? 나는 속임을 받지 않기 때문이죠. ‘저 사람이 나를 속였지. 속일 거지.’ 벌써 앞의 생각에 척 봐서 ‘속일 거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는 여직까지 공부한 게 헛한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걸 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속임을 받질 않아요. 그러니까 길을 지나가다 때림을 받았어도 손은 각각이지만 그 손도 바로 내 손이에요. 내가 나를 때린 거란 말입니다. 딴 사람이 나를 때린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아픔을 느끼지 않아요. 오히려 한번 때려 준 것이 감사하죠. 그렇기 때문에 말에 너무 치우치지도 말고, 색에 치우치지도 말고 모든 것을 나로만 생각해라 이겁니다, 각자. 자기 주처를 똑바로 알고 주처에다 모든 거를, 무거운 짐을, 망상을 다 몰락 놔 버려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 없이는 하나도 없는 겁니다. 자기가 원인이요, 자기가 화두요, 자기가 근본이기 때문에 그 근본은 둘이 될 수가 없다 이겁니다. 그것을 알면 그 근본 자체도 없는 거다 이거예요. 왜? 나투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선 창조라고 그러지만 부처님 법에는 나툼이라고 하죠.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변해 가고 화하고 있고, 육신은 변모돼 가고 있고 그러니 어떤 거를 잡을 게 있나 이겁니다. 그리고 어떤 거를 내세울 게 있나 이겁니다. 일체가 다 공해서 나툼이라 이거죠.
그런데 왜 어떤 사람은 육신도 생리적인 작용의 그림자인데도 불구하고, 이것도 껍데기거늘 거기다가 의지를 하고 그냥, 거기서 나올 줄 알고 그걸 붙들고 쩔쩔매고 10년 20년 썩느냐는 얘깁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치우쳐서 자리를 다투면서 찾아다니는 그런 껍데기들이 많은데, 자기 앉은 자리에서 자기 근본 주처를 똑바로 봐라, 지켜봐라 이겁니다. 좌선한다고 해서 앉아 있기만 해서 좌선이 아닙니다. 서나 앉으나, 자나 깨나, 똥을 누나, 먹으나 입으나 일거일동에 참선이란 말입니다. 시공이 없이 돌아가는 진리다 이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는 거죠.
기독교에서도 ‘무거운 짐을 지고 애 쓰는 자 내게로 오라. 모든 짐을 놔 버리고 편히 쉬어라. 또 편히 쉬게 해 주리라.’ 이러죠. 그와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도 ‘몽땅 놔 버려라. 놔 버리면 네가 만들어 놓은 창살 없는 감옥에서 허덕이지 않으리라. 네 마음으로 짓고 네 마음으로 받는 것이니 그 마음조차 질 게 없는 것이니라. 바로 나툼이니라.’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각자 태어났을 때, 그 태어났을 때가 태초예요. 내가 태어나지 않고 태초라는 게 어디 있어요? 삼천 년이고 사천 년이고 오천 년이고 거슬리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오늘이라는 걸, 영원한 오늘이라는 걸 알라 이거예요. ‘영원한 나의 생명 주처는 항상 이렇게 여여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물이 흘러감도 아니고 흘러옴도 아니니라.’ 이겁니다.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여여하게 그냥 돌아갈 뿐이죠. 나투고 돌아갈 뿐입니다. 그러니 내가 안다고 내세울 게 뭐 있으며, 말꼬리에 말꼬리가 붙어서 돌아가니 스스로 알고 공부해서 그 도리를 깨달으라고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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