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에 대해서
본문
질문
중국 당나라의 선승 조주 스님께서 남전 스님께 “도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평상심이 도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평상심이야 말로 도를 이루는 첩경이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스님께서는 평상심이 어떤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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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옛날에 선지식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비바람이 치고 뇌성벽력을 한들 어찌 발걸음을 막 떼어 놓느냐.’ 즉 말하자면 뛰느냐 이겁니다. 뛸 게 뭐 있어서 뛰느냐 이겁니다. 그냥 묵묵히 지켜보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지켜보면서 한 발짝 두 발짝 떼어 놔라 이겁니다. 옛날에는 10리, 20리 걷기는 우습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길이 지금처럼 아스팔트가 있는 게 아니라 풀섶으로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을, 내 생명과 같이 아끼기 때문에 버러지 하나라도 살생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짚신짝에다가 방울을 달아서 한 발짝 두 발짝 이렇게 천천히 걸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우리는 경망스럽게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어떠한 급한 일이 생겼을 때도 만약에 그것을 제한 못한다면 경망스러운 일이 생기게 되고, 그때는 죽게 됩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경망하면 그것 또한 죽는 일입니다.
그래서 강도가 집에 들어와서 죽인다 하고 칼을 들었을 때도 경망스러우면 그 칼에 찔릴 것이고 경망스럽지 않다면 그 칼에 찔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급한 일이 생겨도 한번 안으로 굴려서 낼 때에, 그렇게 심중 깊이 내가 안으로 한번 굴려서 낼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어야만 급한 일에도 급한 일이 아니게 수습이 된다 이겁니다. 함부로 자기가 건지지 못할 말 한 마디를 하지 말라 이겁니다. 이것이 다 부처님의 법이지 부처님의 법이 따로 있으면 어떻게 부처님이 온 누리에 그 한마음으로 싸고 도는 평상심이 되었겠습니까?
이것도 평상심이라는 그 자체가 무지하게 큰 말입니다. 평상심이라는 이 말 자체 한마디가 전체 우주를 싼 한마디입니다. 반야바라밀다도 없는 바로 그것을 축소한 것이 바로 평상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리고도 평상심의 보시라고 하는 것도 전체를 싼 그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그 말에서 ‘밀다심’ 하는 것도 그것도 보시라고 한마디로 규정을 지어도 좋습니다. 이 보시라는 이 자체 한마디가 너무나 크고 큰 뜻이며 아주 작다고 하면 그렇게 사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얼마나 자비하시기에 인간으로 태어나셔서, 아주 이 세상을 타도한 사람 앞에는 불이법문을 해 주셨고, 이렇게 저렇게 그 사람에 맞게 법문을 해 주셨으니 이 뜻이 얼마나 무궁무진하며 자비스러운 일입니까? 이것이 평상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는 그 평상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본래는 있었지만 그분이 발견하셔서 여러분 앞에 펼치신 그 팔만 사천 법문이 다, 한마디로 규정해서 ‘나는 한마디도 안 했노라.’고 말씀하신 그게 바로 평상심인 것입니다. 낮은 데는 낮은 대로 같이 하나가 되어 주시고 벌레가 보일 때는 벌레로 되어 주시고 높은 데는 높은 대로 하나가 되어 주시고 근기가 높아서 불이법문을 할 때는 같이 또 하나가 되어 주시고 이러니, 자기 아님이 하나도 없이 될 때 비로소 얼마나 그것이 자비며 평상심입니까?
진실하지 않은 눈물만을 흘려 본 사람은 그 진실함을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게 눈물을 흘렸든 진실하지 않게 눈물을 흘렸든 과학적으로나 뭘로 볼 때 눈물이라는 건 똑같습니다. 그 눈물 자체는 똑같지마는 그 뜻은 다 다른 것입니다. ‘난 당신한테 가오리다.’ 그렇게 했지만 당신한테 갈 것도 없고 또 올 것도 없더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저 묵묵히 그냥 한 방울 눈물을 주르르 흘리곤 했지요.
나는 물을 쳐다보고 탄식한 일도 많았습니다. 수많은 스님들을 친견하고 그랬을 때, 주로 많이 친견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 학문으로 풀어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보면 그 학문이 그리웠습니다. 나이 스물이 좀 넘어서 많은 탄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탄식할 것도 없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그 고비가 없으면서도 넘어가는 고비가 얼마나 많았던지, 층층대가 얼마나 많았던지 모릅니다. 평등하면서도 그 층층대가 너무나 많았던 것은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층층대가 많았던 것입니다. 올라가고 내려갈 것도 없건만 인간의 그 살림살이는 올라가야만 했고 또 내려와야만 했고, 내려오면 사양을 받게 되는 이런 문제, 문제점들 말입니다.
그러나 사양 받을 것도 없고 사양 안 받을 것도 없는 이 시점에서 오늘이 영원하다는 거를 여러분이 깨닫고 여러분이 자기 속에 자기가 부처가 있다는 것을 명백히 신임하고 안다면 그것이 바로, 나물 삶아 먹고 물 마시는 대장부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나도 거기에는 거리낌이 없을 겁니다. 살기 위해 먹는 건지 또는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분간도 못하고 살아나가는 이 발걸음 걸음걸이, 이 길….
그러나 여러분하고 저하고 같이 손을 잡고서 이렇게 길을 걷고 있습니다. 층층대든 층층대가 아니든 그것을 논하지 않고, 여러분이 걸어가시는 대로 나는 따라서, 그 층층대가 산더미 같든 수미산 같든 그것을 마다 안 하고 걸어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음으로 지어서 층층대가 있고 그런 것이지, 수미산도 없는 것이고 수미산 아닌 것도 없습니다. 평정한 길을 같이 손잡고 같이 걸어가면서 어떠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고 떳떳하게 우리 뚜벅뚜벅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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