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법 아닌 것이 없을 것 같은데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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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 아닌 것이 없을 것 같은데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오직 마음으로만 뚫으라고 하시는데 세상에는 길도 많고 진리로 가는 방법 또한 한 가지만은 아니어서 정법 아닌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예전에 이런 말이 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이게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는 어렵다 했는데, 그래도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어렵거든요. 그게 두번째예요. 그러고 나서 또한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횡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요!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아요.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그런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녘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죠. 허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달기를 좋아해서, 그 몇 근이나 되는지 그게 의심이 난다고요.

우리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하고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될까요? 그래서 나는 그르고 옳은 것을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칩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지구가 조금도 틀리지 않는 부동한 자세로서 그 긍지를 가지고 지축이 흔들리지 않게 있음으로써,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맙니다.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나는 거죠.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릅니까!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이겁니다. 별성이다 이거예요.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사람도 차원대로 살고 있고 끼리끼리 모여서 회사에 들어갔으면 회사원이죠, 뭐. 장사하면 장사꾼들대로 모일 거고,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 리도 요 눈앞이라 조그마한 그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나?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그렇죠. 무조건이지, 뭘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 만 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8·15 해방되고 나니까 스무 살이 됐고, 그때 한 큰스님한테 갔는데, 예전에는 차가 없고 참 길도 험악하고 그래서 서울에서 거기 가려면 무지하게 차를 타고도 하여튼 무지하게 걸었단 말입니다. 홍성으로 해서 이렇게 넘어가는데 아주 그건 뭐 길도 험악하고 그랬죠. 그러니까 며칠을 걸려서 그렇게 갔으니, 얼굴은 뭐 흙투성이고 그건 뭐 말도 못해요. 나 생긴 거 보세요. 조막댕이만한 게 얼마나 그때 험했겠나. 눈물을 질질 흘리면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그 스님이 있다 하는 소리가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러시는데 그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그게 자는 게 아니죠. 눈 뜨고 자야, 어디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건 그런 거죠. 그래서 속으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 무식한 척하면서 둔한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습니다.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요. 이 머리로 다 알아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이게,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여기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요. 여길 통해서 다 그냥 자기한테 전부 오는 게 있으니 그놈의 오는 거가 수많은 게,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언제나 누구나가,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이렇게 상황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이죠. 못난 내 탓이란 말입니다. 잘나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에요. 그 내 탓이라는 그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참 이익하게 말을 상하지 않게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야 하고 안에다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됩니다. 잘되고 못되고,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공부를 하겠다 못하겠다, 이런 것이 공부다, 저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걸 다 놔야 돼요.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됩니다.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낳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다는 것을 아시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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