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이 없이 살라고 하신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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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배워야 할 게 있고 해야 할 게 있고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는데 내가 없이, 함이 없이 살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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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어떤 것이 진실한 불교냐 생각해 본다면 그냥 생활이 불교입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이런 거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한 지구 안에서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불교이며 그대로 사는 것이 참선이며 그대로 사는 것이 여여한 것입니다. 그 ‘마음을 낸다’ 이런 것은 자기 자신의 자유지만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어떻게, 이걸 썼다 저걸 썼다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썼다고 한 가정에서 이렇게 산다 하더라도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에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네.” 하고 자식의 노릇을 해 줘야 됩니다. 또 “아버지!” 하고 부르면 아버지의 노릇을 해 줘야 되겠죠. “여보!” 하고 부르면 남편 노릇을 해 줘야 하고요. 자동적으로 그건 그렇게 되는 게 아닐까요? 이 자동적으로 모든 생활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거를, 내가 아버지가 됐을 때 내가 했다고 했을까 또 아들 노릇을 할 때에 내가 아들 노릇을 했으니까 나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 노릇을 했다 하더라도 내가 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왜냐. 그렇게 자동적으로 많이 했어도 함이 없이 했을 뿐이다 이거죠. 우리가 여기 들어올 때에 걸어서 들어오기는 틀림없이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발자취를 짊어지고 오신 분이 있으신가 생각해 보세요. 모든 거를 자기 자신들이 하시고도 하신 게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짊어지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마음 하나가 잘못됐으면 그 과거를 외려 붙잡고 간다 이겁니다. 어저께 한 일도 오늘 걱정을 해야 하고 그걸 붙들고 쩔쩔 매고, 1초 전도 과거니까요. 1초 후도 미래니까요. 그럼 현재만 있느냐. 현재만 있는 것도 아니다. 현재도 공했단 얘기죠. 과거도 현재고 미래도 현재고 현재도 공했으니까 모두 여러분이 할 뿐이지 한 것은 없다 이것입니다.
어떤 것을 듣습니까? 듣는 것을 하나만 듣고 마는 겁니까? 똑같은 걸 듣습니까? 이걸 듣고 또 딴 거 들어야 하고 또 딴 거 봐야 하고 딴 거를 해야 하고 딴 사람 만나야 하고, 이건 일일이 이렇게 돌아가면서 이렇게 작용을 해야 하니까 이것은 얼른 쉽게 말해선 공용(共用)입니다, 공용! 공용인 까닭은 왜냐. 내 오장 육부에도 생명체가 천차만별로 들어 있으니까요. 이 몸속에 생명체가 그렇게 많이 들어 있어서 의식이 자기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이 모든 의식들이 자기가 마음먹는 대로 따라 주게끔 만들어야 될 거 아닙니까. 이 오장, 이 인간의 한 모습이 한 세계라고 봐도 됩니다. 우리 인간이 이렇게 크다면 요만하게 좁쌀 알갱이만하게 하나 만들어서 넣어 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것이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다 이겁니다.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이 많은데다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또 이름이 주어져 있죠. 우리네 세계, 이 지구 하나의 세계가 벌어져 있듯이. 위다 장이다 척수다 척추다 방광이다 장이다 하는 그 이름들이 수효가 없습니다. 다 따지자면 수효를 어떻게 그걸 일일이 헤아리고 다니겠습니까. 그러나 내 마음 하나면, 즉 말하자면 하나면 의식이 다 거기에 포함돼서 하나로 작용을 하게 되니깐 공용(共用)이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내가 내 마음이, 아파서 관하면 의사가 돼 주고 또 집안이 안돼서 관하면 관세음이 돼 주고, 이 소리는 뭐냐 하면 해결사가 돼 준다 이겁니다. 그리고 때에 따라서 관하면, 자기 용도에 맞게 관하면 또 보디가드가 돼 주고, 이거는 천차만별로 자기가 용도에 따라서 다가오는 것대로 현실로서의 그것이 행이 되니까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이 천만의 말이지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있느냐는 의문이죠.
모든 주처는 자기네들이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주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형성시켰고 자기가 형성됐기 때문에 주처는 자기한테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네 주처는 뿌리와 같고 자기 모습은 싹과 같은 것이죠. 그러게 싹은 뿌리를 믿고 뿌리는 싹을 돕고 이래야 푸르게 살 수가 있다는 얘기죠. 이 불교라는 것이 이름으로만 ‘불교 불교’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단어는 진리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몰라서 나라가 싸우게 되고 나라가 분쟁이 일어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은 이치가 바로 우리가 모르니깐 그렇다 이 소립니다. 예를 들어서 이 지구를 어느 혹성이, 즉 말하자면 부딪치게 됐다 이런다면 어떻게 해야만이 그거를 해결을 하겠습니까. 이 불교란 너무도 심오하고 너무도 광대해서 무변한 겁니다. 내 마음은 체가 없어서 그 혹성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혹성이, 내가 혹성이 된다면 그것을 멀리 해서 부딪치지 않게 하는 그런 이유가 있죠.
그와 같이 사람은 ‘오늘이 며칠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시간적으로 따져서 지금 며칠 며칠 하지만 포괄적으로 본다면 ‘어디 무엇이 이렇게 있다더라’ 이렇게 말을 하고 떠나면 그거는 벌써 100년 200년을 돌아가요. 그러니까 ‘어디 있다. 어디가 이것이 꼭 이렇게 돼 있다. 이것이 꼭 이렇게 있다. 이거는 이렇게 한다. 이거는 저렇게 한다. 때가 되면 이렇게 죽는다. 때가 되면 이런 문제가 일어난다.’ 이런 것도 그냥 그건 난설이에요. 왜냐? 예언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예언이라는 것이 없는 까닭이, 이렇게 이 컵이 지구라면, 얼른 쉽게 말해서 이렇게 있으면, 벌써 1초 후면 이렇게 딴 데 가 있어요. 모든 물질이 다 그렇게 변화가 오는 겁니다. 사람은 늙고 또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변화가 무쌍하죠.
그러니깐 이 많은 말을 하고 많은 행동을 하고 그러는 것이 하나도 한 게 없다 이겁니다. 한 게 없이 했을 뿐이다 이겁니다. 그 이유를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편안하게 사실 겁니다, 아마. 그리고 죽는다 산다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형성돼서 이 세상에 나왔죠? 죽어가는 것도 이 세상에서 가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서 살아온 것이 없기 때문에 죽어갈 것도 없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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