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대원경지가 무엇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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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부처님의 대원경지에 대하여 확실하게 다 이해하고 알 수 있도록 화통하게 좀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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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사람이 닦지도 않고 그런 거부터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이라는 게, 내가 항상 얘기했듯이 모든 억겁 천 년 전서부터 자기 습을 짊어지고, 종문서를 짊어지고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게 닿기만 하면 타 버리는 그런 이치에 도달해 있으면서, 그대로 그렇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그것을 모르니까 그것을 되집어서 그 높은 경지가 따로 있는 것처럼 자꾸 묻는다 이겁니다. 자기가 알아야 할 거를 알아야 ‘아, 이거는 높게 있는 게 아니고 얕게 있는 것도 아니로구나. 이건 바로 나한테 있는 거로구나.’ 하고 알 텐데 말입니다. 만약에 나한테 있는 걸 알게 되면 타의에도 내가 있는 걸 알고, 저 사람이 나 아님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또 나와 더불어 같이 나투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런다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말로 해서 아는 걸로 삼천대천세계의 근본, 그 본처를 갖다가 꿰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게 물어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님으로써 우리가 학식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 주인공에서 만법이 나오는 것을 자기 주인공에 되놓는다, 맡겨 놓는다. 맡겨 놓지 않고는 도저히 그 습을 뗄 수가 없습니다. 또 그 습이 없다면 인간 자격이 없죠. 본래는 망상이 망상이 아니고 습이 습이 아니지만, 그 습이 있기 때문에 문이 가려졌고 눈도 가려지게 되고 자기 마음을 가리는 거예요, 본래 문은 없건만. 그러니까 일심에서 나오는 그것을 일심에다 놔라 이겁니다. 놓으면 홀연히 거기에서 다 알게 돼서 그때는 점검만 하고 돌아가면 될 걸 말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날까지 말이 필요 없으면서도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얘길 했던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쯤은 알아야 될 거 아닙니까. 또 살아가면서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서 이렇게 묘한 법이 나와서 내가 움죽거리고 있는지 그것을 모른다면, 항상 얘기했듯이 내 몸 하나도 이끌어 가지고 갈 수 없는 그런 문제가 생기는 거죠.
물론 부처님 법은 그대로, 우리가 아픈 것도 법 안 아픈 것도 법, 죽는 것도 법 사는 것도 법이라고 해서 ‘이것이 진리다’라고 얘기를 했지만,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에서 깊숙하게 자기 주관을 세워서 지혜가 넓은 사람들은 좀 유유하게 살아나가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아주 마음이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한테 항상 이렇게 밟히고 또는 거절당하고 또 화목하지 못하게 되고 또 상대방하고도 거리가 생기고, 이렇게 함으로써 적합하게 가정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는 그런 걸로 인해 자꾸 싸움이 생기고 가정파탄까지 되는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긴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러한 문제들이 생기는 원인도 바로 자기거든요, 누구의 탓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우리가 아픈 것도, 공부한 부처님께서도 아프셨으니까, 중생들을 위해서 그것을, 그대로가 법이라는 걸 가르쳐 주기 위해서 보이셨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는 ‘육신은 바로 내 주인의 거고 내 주인의 시자고, 내 주인으로 하여금 형성됐으니까 주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이렇게 변질되고 바숴지고 이러는 것이니라.’ 하고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방편을 써서 잠깐씩 이렇게 하셨단 말입니다. 그건 방편으로 쓰신 거지 자기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몇 년씩 아프다가 고통을 받고 만약에 옷을 벗는다면 그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평화롭고 참, 티끌 하나 묻지 않게, 내가 생동력 있게, 삶을 보람 있게 그렇게 살면서도 후딱 옷을 벗어 버려서, 잠시 잠깐 그것도 아프지 않게 아팠더라면 상대방들도 고통을 받게 하지 않고 나도 고통 받지 않고, 이렇게 진리가 이러하다 하는 것만 가르쳐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살아나가면서 야, 불법이 이렇고 저렇고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도 다 옳죠. 그런데 옳은 건 뭣 때문에 옳다고 하느냐. 이 세상엔 자라는 애들이 있고 지금 나온 애들이 있고 또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오는 생물이 있고 동물이 있고, 무정물이 있고 식물이 있고, 모두가 천차만별로 그런 생명들이 있는 거예요. 그 생명들이 있어서 점차적으로 올라오는 그 뜻을 볼 때 우리가 언제 적의 부모고, 언제 적의 자식이고, 언제 적의 친척이고 그랬던가. 모두가 이럭해서 차원대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또 흩어졌다가 내가 깡통의 차원이라면 깡통끼리 모일 거고 넝마끼리 모이고 금대로 모이고 이렇게 모여서 살다가 또 흩어지는 거예요. 흩어졌다 모였다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것을 뭐 그렇게 잘됐다 못됐다, 이게 정법이니 사법이니 이거를 따지고 들어야만 하겠습니까.
어린애 적엔 모를 거고 좀 컸으면 철을 알 거고 더 어른이 됐으면 더 철이 나서 이 세상살이를 다 알 거고, 그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이 늙었으면 애 노는 데서는 애가 돼 주고, 그럼 말썽이 없을 것 아닙니까? 젊은이들 노는 데는 젊은이가 노는 대로 젊은이가 돼 주고, 늙은이가 있으면 늙은이가 돼 준다면 얼마나 겸손하고 자비하고, 그 모두가 모르면 모르는 대로 나도 몰라준다면 얼마나 편리하겠습니까. 알면 아는 대로 나도 알아주고, 나 아님이 없는데 말입니다.
내가 항상 그러지 않습니까. ‘법당에 올라가도 그 부처님 몸이 내 몸이요, 바로 부처님의 마음도 내 마음이니 둘이 아닌 고로 거기에서 절을 삼 배를 올려도 자삼보에 그대로 하는 것이다. 글로 한데 합쳐도 되고 일로 한데 합쳐도 되고, 이리 가도 하나고 저리 가도 하나다.’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게 되면 그 하나마저도 내세울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그것은 부처님의 뜻을 그대로 우리는 세존의 자리에 할 수 있다는 그런 결론입니다. 그것이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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