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백종과 같은 절차가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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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마음선원은 모든 것을 자신의 근본 하나로 돌려서 자기를 밝히는 공부를 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불 의식을 할 때 죽은 사람을 위해서 지장 정근을 해서 지장보살을 찾는 이유는 무엇이며 서양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고 그래도 다들 잘 사는 것 같은데 왜 굳이 천도재를 지내고 당대의 부모뿐 아니라 조상들을 위해서 백종과 같은 절차를 치러야 하는지요? 이 마음공부를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이론과 실제가 너무 동떨어진 것이 아닌가 싶어 질문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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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 대중이 돌아가는데, 한 회사가 돌아가든지 한 나라가 돌아가든지, 공해서 같이 돌아가긴 하는데 같이 돌아가면서 이 사람은 이쪽 소임을 맡고 이 사람은 여기 소임을 맡아야 하고 소임이 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이건 하나로 둥글게 돌아가는 동시에 이거는 이것대로 소임을 맡고 이건 이것대로 소임을 맡고 다 소임을 맡게 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바닷물에는 주해신이라는 이름을 갖고 거기 소임을 맡고, 또 산에는 주산신이라는 이름을 맡고, 다 보살이 책임을 맡는 거예요. 또 주림신이라는 이름을 맡아 가지고 온갖 나무와 풀들을 관리하는 소임을 맡았다 합시다.
그러면 이 인간의 마음은 다 이렇게 똑같지만, 근본은 똑같지만 마음을 부리는 거는 다 각각이란 얘깁니다.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전부 마음을 내서 부리는 것은 다 각각이란 얘깁니다. 그렇듯이 지장은 지장, 관세음은 관세음, 이렇게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것이. 지장이라는 것도 그 소임을 맡았기 때문에 지장이라는 이름이 있는 겁니다.
근데 우리가 만약에 20개든지, 12개든지 소임을 맡은 이름이 지장이다 관세음이다 칠성이다 뭐, 산신이다 해신이다 이렇게 모두 이름을 붙여 놓고 있는데, 우리가 그거 하나를 부리려면 “아무개야!” 하고 불러야 되죠? 아, 지금 당장 우리도 여기 주욱 있는데 누구 하나 이렇게 심부름을 시키려면 “누구야!” 하고 그 소임자를 불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지장 정근을 할 때는 그 소임을 맡아 가지고 하는 그 이름을 불러야, 이게 자기 이름을 불러야 대답을 하고 오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감독이면 그 감독 이름을 불러야 하고, 직원이면 직원 이름을 불러야 대답을 하고 오고 이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두루뭉수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지장보살, 관세음보살, 또는 산신보살 또 해신보살 또 주림보살, 그냥 수없이 많죠. 지신, 이런 것도 다 거기 속해서 소임을 맡아 가지고 주욱 있는데 그 소임 맡은 대로 이름을 붙여 놓는 거거든요, 부처님께서. 그 붙여 놓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아무도 대답을 안 해요. 그러니 소임 맡은 사람을 불러야 일을 시키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보이는 데서 하는 일도 아닌데, 보이지 않는 데서 보살이 일을 하는 건데 어떻게 이름을 안 불러요? 알지도 못하고 뛰는 사람들이지.
그리고 서양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잘 사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됐느냐 하면 유교가 번성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이게 원래 불교가 그렇게 된 게 아니고 유교가 그냥 체인지가 돼서 같이 돌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지, 불교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미국에 가서 가만히 하는 걸 보니까, 예를 들어서 천주교라면, 다른 점도 있겠지만 그 믿는 사람들이 바깥으로 믿어서 그렇지 이게 안으로만 믿는다면 진짜로 최고란 얘기죠. 이렇게 미사를 드리고 할 때에 자기가 영혼을 불러 주고 영혼에 그 모든 것에 혜택이 있게끔 이렇게 하는 거는 우리 유교에서 제사 지내는 것보다 더 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안으로 하질 않기 때문에 맞아져 들어가질 않은 거죠. ‘하나님, 주님’ 하고 바깥으로 찾기 때문에. 그런데 형식은 미사를 드리고 꽃하고 뭐 이렇게만 하고선 그냥 지내는데, 원칙은 그게 맞는 거예요, 형식은. 근데 진짜 이 안에서는 맞지 않기 때문에 지금 그런 거죠.
그렇다면 우리가 제사상은 왜 차리는가. 지금 우리가 사는 데가 물주머니라고 합시다. 그런데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물주머니 안에서는 상 차려서 먹고 뭐 만날 똥 싸고 먹고 똥 싸고 잠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근데 그것이 살아가면서 보니까 이 모두 습관이 돼 버렸지 않습니까. 사람이 사는 것에 대해서 습관이 되고. 지금 상을 차려 놓고 하는 거까지 습관이 돼 버렸죠, 오히려 습관을 만들어서. 그런데 이것은 이 주머니에서 넘어서려고 하는 사람들이 상을 차려 놓고선 영가를 불러서 그렇게 한다면 오히려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겁니다. 우리는 그 주머니를 벗어나면 먹고 똥 싸고 하는 것도 다 그냥 벗어버리는 거거든요. 그런데 죽어서도 그렇게 한다면 거기에 관습이 더 생겨서 여기서 조상들을 더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거다 이겁니다. 지금 바깥으로 벗어나게 하려고 그러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절에서는 떡 하나 이렇게, 이 떡은 이름 그대로 우주떡입니다. 일체 만물만생이 다 먹고도 이 빵떡은 되남는다 하는 겁니다, 그냥. 그래서 방편을 복잡하게 하지 마시라 이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떡 해 놓고 과일이나 놓고 꽃이나 놓고 향, 초, 그리고 물 한 그릇은 이런 다기 그릇에, 요만한 작은 그릇에 놓지 말고 큰 그릇에다 놓아라 이랬습니다. 그리고 천도할 때는 또 딴 그릇에, 큰 그릇에다 놔라. 이런 건 지금 이 공간 안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거든요.
그래서 재를 지내는데 우주떡 하나에다가 과일 세 가지를 한 접시에다가 놓고 향, 초, 흰 꽃, 위패하고 천혼문 쓰고 큰 그릇에 청수 한 그릇을 떠 놓고 그렇게 지냅니다. 그것도 없어도 되는데 방편이란 말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도 안 해 주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왜 꼭 해야만 되느냐. 그건 자손들에게 교훈도 주고 조상의 은혜도 알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도 그 영혼은 삼혼(三魂)이 항상, 하나는 태어나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돌아다니게끔 돼 있어요. 근데 조상이 몰라요? 보이지만 않을 뿐입니다. 아마 ‘이 괘씸한 놈!’ 그러곤 뒤돌아서서 후적후적 갈 거예요. 절을 한다 안 한다 이걸 떠나서 고개를 숙일 줄 모르면 자기를 자기가 승화시킬 수가 없어요. 자기가 자기를 고개 숙이게 할 줄 알아야만 된다는 얘기죠. 벼이삭도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이 사람이 권리가 많아질수록 고개가 숙여져야 되지 않을까 생각이 돼요. 그래야만이 더 지혜롭고 더 풍부해지고 전체 바다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 물이 수증기로 올라가서 정화돼서, 하다못해 요만한 벌레, 요만한 풀 한 포기라도 남김없이 다 먹일 수 있는 바로 그런 청수가 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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