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없이 시험을 보려면…
본문
질문
시험을 앞두고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입니다. 그런데 학생회에 다니면서 스님 법문 중에서 ‘내가 없다. 나를 버려라.’ 이런 말씀을 듣고 지금은 내가 없다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거든요, 순간순간에요. 그러다 보니까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하고요, 시험도 시험으로 느껴지지 않고 그냥 일과로 생각이 되고, 그냥 편안한 마음밖에 안 듭니다. 그런 제 마음에 대해서 스님께 정말 감사를 드리고요, 그리고 저를 비롯해서 전국에 있는 수험생들이 시험에 대한 두려움 없이 마음 편하게 치를 수 있게 그렇게 마음내 주기를 바라고 여기 섰습니다. 마음내 주십시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마음을 제삼자에게 내 달라고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다 통한다.’ 이런 걸 좀 알아야 돼요. 즉 말하자면 남한테 마음을 내 달라 하기 이전에 내 마음을 내면 더불어 같이 내진다는 말이에요.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지 마라.’ 이런 것도 아니고 ‘생각을 내지 마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험을 보는데 어떻게 그것을 이것저것 다 버리고 편안하게 하겠습니까만, 편안치 못하든 편안하든 다 버리는 겁니다. 놓는 겁니다. 이 몸뚱이가 고정됨이 없이 바로 화해서 나투면 찰나찰나 나투는 까닭에 공했단 말입니다.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했고 어떤 거를 할 때에 내가 안 했고 이게 없다 이 소리죠. 그런 까닭에 주인공 자불이 나의 모든 기능을 합해서 시험을 보는 거니까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잖아. 합격되게 할 수 있는 것도 너뿐이야.’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 한해서는 자기 보배를 자기가 응용 못하고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자꾸 내가 무엇이 모자라는데, 내가 무엇이 모자라기 때문에 누구한테 무엇을 물어봐야 하고, 책을 찾아 봐야 하고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기죠. 그러니까 이 모두를 볼 때엔 모두 자기 할 탓이죠, 아주 간략하게 말해서요. 모든 게 자기 할 탓이다. 자기가 하는 대로 삶도, 악도 선도 다 살고 있다. 자기가 할 탓이다 이거죠. 자기가 한 대로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자기네들이 한 탓으로 이렇게 되니까 너희들이 좀 벗어나서 살아라 하고 일러 주신 거죠.
예를 들어서 닭이 왜 사람으로 부화를 못하느냐. 닭으로 살던 습이 머리에 쟁여져서 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 닭의 습성이 있어서요. 돼지도 그렇고 말도 그렇고 소도 그렇고 다 그래요. 그 살던 습성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람도 그 습성을 다 거쳐 올라온 사람들입니다. 올라와서 사람까지 이르렀는데 사람도 천차만별로 차원이 있으니 이것을 어찌하느냐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두 생각해서 될 것도 아니고 ‘한생각을 잘하라’ 이런 뜻입니다. 생각하고 논의하고 그래서 될 일이 아니고 한생각, 보는 순간 듣는 순간 한생각 잘하면 그게 법이 된다 이거예요. 법이 되면 한 발짝 떼 놓지 않고도 가만히 그 보살 응신들이 다 해결을 해요. 우리가 지금 한 발짝 떼어 놓지도 않고 이렇게 사는 겁니다. 본래 한 발짝 떼어 놓은 바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직결돼 있다고 그렇게 얘기를 해 줘야 되는데 한 발짝도 떼어 놓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별나게 사는 걸로만 돼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렇게 벗어나기가 어려운 거예요.
우리가 찰나찰나 화해서 나투고 끝없이 돌아가는 이 진리를 파악한다면 우리가 할 거 다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한 것이 되죠. 내가 항상 말하죠. 여기 올라올 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지고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고요. 우리 생활이 그런 생활이거든요. 그러니 그 발자국 떼어 놓는 동안에 어떠한 발자국을 떼어 놨다고 말하겠습니까?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했고 어떤 발은 떼어 놓을 때 내가 안 했습니까? 떼어 놓은 대로 없어지는 것을요. 찰나에도, 지금 내가 말을 하면서도 과거로 돌아가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기 이전에 미래도, 바로 미래와 과거 교차로에서 우리가 하기에 달렸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을 먹어도 한마음을 먹기에 달렸다 이겁니다.
내 몸속에도 생명들이 많으니까 한 개체를 더불어 한마음으로 해야 되는 거죠. 사람들이 다 알아야 할 일이고 진리를 파악해야 할 일이고 진리 속에서, 악과 선 그 가운데서 내가 악에는 어떡하고 선에는 어떡해야 하는지 그 도리를 말하는 거죠. 보이지 않는 무의 세계에서 용법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거죠. 즉 말하자면 ‘공법’이라고 해도 되고 ‘용무’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함이 없이 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면 어떠한 거든지 손색이 없을 겁니다. 정말입니다. 실천을 항상 해 보십시오. 자기가 실천해야지 아무리 부처님이 있고 일체제불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실천을 해서 감응이 되고 감응이 되면 한생각 해 보시고 ‘아, 이렇게 가는 거로구나.’ 하고, 또 상대를 만나 보면 내가 차원이 얼마나 됐는지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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