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을 계속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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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보조 스님의 수심결을 읽다가 문득 보고 듣는 이에 대해서 자각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생활 중에 될 수 있으면 잊지 않으려 하지만 때론 자각되기도 하고 어느 땐 잊혀지기도 하며 생활하고 있습니다. 수행 중 이러한 경계가 바른 것인지요. 수행에 있어 이러한 자각을 염념상속 해야 하는지, 아니면 몰록 놓고 가야 하는지 여쭈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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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그래서 나는 콩나무로 가끔 비유를 합니다. 어저께 콩씨를 오늘 아침에 심었더니 콩나무가 나더라. 그런데 그 콩나무는 어저께 콩씨가 자기 몸으로 화(化)해진 것을 모르고 어저께 콩씨를 찾느라고 바깥에서 애쓰더라. 오늘의 콩나무로 화한 콩나무는 그 콩나무에 바로 콩이 열렸다는 것을 자각한다면 우리가 그 콩씨를 바깥에서 찾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가 움죽거릴 수 있고 작용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바로 자기의 참생명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선은 움죽거리지 않지만 자기가 움죽거리는 것은 바로 바퀴와 같이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봉은 움죽거리지 않듯이 그렇게 광대무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콩씨가 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으면 깨닫는 대로 또 안으로 굴려서 자기가 나침반을, 중도를 세워서 항상, 입으로 나쁜 말이 튀어나오더라도 안으로 굴리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해서 인연을 맺고 또는 그렇게 해 나간다면 우리가 아마 부처님의 그 가르침의 뜻을 그대로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시대에 맞춰서 꼭 알아야 할 문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대 돌아가는 것을 세계적으로 보세요.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면서 이 땅의 주인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각자 주인입니다.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게 무엇인가? 그 생명선에 의해서 주어진 모든 것, 음파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빛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광명선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컴퓨터의 조절이라든가 영사기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인과의 조절이라든가 또는 탐지기의 조절이라든가 무전기의 조절이라든가 이런 것이 다 자연적으로 자기한테 주어져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깊이 생각해야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물질과학이니 문명이니 문화니 철학이니 하는 모든 과목도 바로 인간에게서 주어지고 인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물질과학으로서, 문명으로서 이렇게 발전된 것을 기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만들어 놓고 여러분이 바로 거기에서 죽어 간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우리가 리드해 나갈 수 있는, 앞장서서 이끌 수 있는 그런 만능적인 자유인이 되고자 해서 우리는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공부하는 자체가 벌써 자기가 사는 게 아니라 자기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산다고 아주 그냥 야단들이거든요. 자기가 사는 게 뭐 있습니까? 물 한 모금을 먹어도 혼자 먹지 않고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생명들이 서로서로 먹고 사는데. 이것은 과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하고 의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고 어느 과목이든 들어가지 않는 과목이 없어서 심성천체물리학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禪)과 학(學)은 둘이 아닙니다. 몸과 자기 불성도 둘이 아닙니다. 콩씨와 콩싹이 둘이 아니듯이 뗄래야 뗄 수가 없죠, 그거는. 콩싹이 없어도 콩이 없고, 콩이 없어도 콩싹이 없으니까요. 진짜로 ‘아이고, 나는 바빠서 할 사이가 없어서 못합니다.’ 요러는 사람도 있거든요, 또. 그럴 때 보면요, 난 저절로 웃음이 나고 아주 죽겠어요, 그냥. 아니, 세상 살아나가는 게 그냥,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나가는 게 자기가 태어났으면 콩씨가 콩싹을 형성시켜서, 자기가 또 콩씨를 만들려고 이렇게 하는 건데, 그러고는 살아나가는데 아이, 글쎄 누가 백일기도를 하랬나, 누가 삼천 배 절을 하랬나?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좀 앉아서 ‘주인공(主人空), 너만이 네가 있다는 증명을 해 줄 수 있어.’ 하고 관(觀)하고, 또 여유가 없으면 그냥 서서 일하면서도 그렇게 관하고, 앉으나 서나 변소에 가나 더럽고 깨끗한 게 불법엔 없으니까, 변소에 가나 어딜 가나 자기가 있는 자리에 있으니까 다 그냥 통하는데 뭐가 바빠서 못합니까, 글쎄. ‘난 참, 바빠서.’ 하고 이렇게 모르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바깥으로만 끄달리던 분들도 안으로 관하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그렇게.
그러니 여러분은 진짜 내가 있으니깐 모두가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하시고, ‘콩씨와 콩싹은 떼려야 뗄 수 없구나.’ 하는 걸 생각하시고, 또 자손들도 그렇습니다. 업으로 자손을 낳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원수로 자식이 생기는 수도 있고 또 선업으로 자식이 생기는 일도 있고 천차만별입니다, 그 자식이라는 게. 그렇다면, 자손들도 원수로 태어났다면 말도 못하게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또 선업으로 태어났다면 그 가슴에 그렇게 좋은 결과를 주어서 흥락하게 만듭니다. 또 원수가 아니고 업장으로다가 만났다 이런다 하면, 극하게 그렇게 나가서 그냥 온통 그 속을 썩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녹이려면 말로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때려도 아니 됩니다. 말로 한다면 오히려 더 빗나가요. 아주 듣기도 싫어하고요. 그리고 만약에 때렸다 하면 ‘아이, 요놈 때렸어!’ 하곤 그냥 또 나가죠. 여러분도 참 경험 많이 하실 겁니다. 그런데 요거를 녹이는 방법이 어떤 거냐. ‘업장이 생기게 한 것도 너고 업장이 안 생기게 한 것도 너고, 그러니까 나는 더불어 같이 공(空)했어. 나는 내가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저지른 것도 아니고, 모두가 너만이 해결을 할 수 있어.’ 그러곤 그냥 딱 거기다가 맡겨 놓고 지켜보기만 하라 이런 겁니다. 개미도 나가서 자기가 배가 고프면 먹을 줄 아는데 어찌 사람이 나갔는데 자기 살 궁리를 안 하겠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부처님 제자로서 이렇게 모두 배우려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마는 우리가 이 허깨비 같은 몸으로만 배우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선과 더불어 거기에 마음을 낼 수 있는 그 자체, 몸을 움죽거릴 수 있는 그 자체, 삼합(三合)이 공존이 돼서 우리가 이렇게 여여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러분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우리가 비교할 때 항상, 어저께 부처와 오늘 부처가 둘이 아니며, 그럼으로써 여여하게 활용할 수도 있고 이렇게 한 발 떼어 놓으면 한 발 없어진다는 그 점을 상세히 생각한다면 그대로가 부처님 법이며 그대로가 가르침이며 그대로가 행이며 그대로가 여여한 줄을 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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