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의 삶을 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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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스님께 삼 배를 올리오며 질문을 드립니다. 얼마쯤 전에 사고로 몸을 심하게 다친 후 관하며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너무나도 제가 잘못하였던 부분들이 다가옵니다. 참으로 참회를 하고 싶은데 어떻게 지어가야 하며 가난과 고독함,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잘못한 일에 대한 회한이 한꺼번에 올 때는 어떻게 관하여 가야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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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내가 항상 저 나무들 뿌리하고 싹에 대해 얘기를 하죠? 그런데 나무 싹이 있으면 뿌리가 있듯이 누구나가 다 본래 그렇게 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네 뿌리는 바로 네 주인공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그리고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 말을 하자면 일체 우주 전체를 한데 싸서 콩 알갱이 하나로도 할 수 있고, 한 사발로도 할 수 있고 한 주먹으로도 할 수 있고, 아주 없이도 할 수 있단 얘깁니다.
그 모두를 콩 하나로 해서 짊어지니까 짊어질 수도 없이 무겁더랍니다. 그런데 그거를 어떡하면 빨리 해소를 시킬 수 있나. 그래서 그냥 무조건 관하라고 그런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믿는 것만치 없어질 거고, 믿지 못하고 뭐를 얻으려고만 한다면 자기 정성에 의해서 그것이 조금 나을 뿐이지 없어지거나 그런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현재만 살려고 그러지 말고 세세생생을 살기 위해서,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서 그걸 벗어 버려야 된다는 겁니다.
지금 짊어진 콩 한 알갱이를 산더미 같은 산이라고 그런다면, 우리는 산 하나를 짊어지고 다니는 셈이죠. 그런데 ‘그 무거운 거를 그냥 다 놔라.’ 이 소린데, 그러면 그렇게 진짜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자기 주인공이라는 자기 자불을 진짜 꼭 믿어야만 하는데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면 알죠. 눈 뜨고 보고 귀를 기울여 듣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형성시켜서 이끌어 나갈 수 있게 만든 자가 누구냐는 얘깁니다. 자기 종자인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자기 종자라는 근본인데, 그 근본으로 인해서 자기가 생겼다면 그 근본에다가 다 놔야죠. 진짜로 믿고 놔야죠. 하는 것도 먹는 것도, 똥 누는 거, 뭐 일상생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그놈 때문에 움죽거리게 되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산 하나다 해도 되고 콩 한 알갱이다 해도 되는데, 그 콩 한 알갱이가 짊어질 수가 없으리만큼 무겁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그거 하나를 없애려고 한다면 진짜로 믿고 무조건, 가난하든 부자든, 돈이 있든 없든, 밥을 굶든 먹든, ‘굶지 않게 해 주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고, 길을 걷게 하는 것도 너고….’ 이렇게 전부 다 주인공이 하는 것임을 믿어야죠. 자기 모습이 자기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부처님 머리 위에 상투를 이렇게 하나 해 놓기도 하고, 또 때로는 부처님을 이마에다 새겨 놓기도 하고, 지금도 해 놨지만 때로는 금으로다 이렇게 해 놓은 것은 바로 그게 크고 좋아서가 아니죠. 그 뜻으로 볼 때는 ‘텅텅 빈 모습이다. 텅텅 빈 모습인데 무엇이 있겠느냐. 그런데도 갖추어 가지고 계신다.’ 하는 거죠. 텅텅 비고 없기 때문에 갖추어 가지고 있는 거지, 뭐가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오장 육부가 다 있다면 갖추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내 손도 빈 손 부처님 손도 빈 손, 내 발도 빈 발 부처님 발도 빈 발, 부처님 몸도 빈 몸 나도 빈 몸, 빈 몸이니까 빈 마음, 함도 없이 하고 가는구나.’ 하고 말할 수 있죠. 그러니 이 모두를 알 양으로 애를 쓰지 말고 모두가 공했다는 거, 우리가 공해서 함이 없이 하면서 지금 생활을 하고 간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가 수억겁 전년서부터 인과로써, 인연으로써 둘이 아니게끔 돼 있다는 거, 그러니까 모두 그 뜻만 대략 알면 그냥 믿고 가도 된다 이겁니다.
부처님께서 어느 바보에게, 아무리 가르쳐도 모르니까 빗자루를 하나 줬단 말입니다. ‘너는 이 빗자루 하나 가지고 항상 쓸고 털고 그래라.’ 하고요. 거기서 터득을 한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수없이 안다 하더라도 아는 것을 다 놔야 된다. 아는 것을 다 놓지 않는다면 그 아는 것 때문에 길고 짧고, 이렇고 저렇고, 이론이 많아서 외려 갈 길을 더디게 만든다.’ 이런 소리죠.
그러니까 일거수일투족을 버리라는 게 아니에요. ‘하되 함이 없이 해라. 공했으니까 너는 함이 없이 하는 것이다.’라는 거죠. 왜, 텔레비전이나 극장 스크린에 화면이 이렇게 나오죠? 화면에서 별짓 다 하죠? 그렇게 연기한 사람이 집에 앉아서 보니까 자기가 그렇게 별짓 다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저거는 내 환상이 저렇게 하고 있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서 그걸 보고 있다고 하겠죠. 그렇게 온통 모든 것을 환상으로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진짜처럼 사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어디 다치거나 그런다면 그냥 야단나죠. 그러나 환상인 것을 알면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 이런 것이 다 무심하게 돌아가죠. 알게 되면 얼음판을 걸어와도 아주 편안하게 걸어올 겁니다.
그래, 사람들이 강을 건너는데 얼음이 두껍게 얼었더랍니다. 그런데 고기들을 잡느라고 얼음을 깨 놓은 자리가 큰 것들이 있어서 잘못 걸으면 풍덩 빠져서 야단들이 나니까 조심스럽게 걸어오는데, 스님네 둘은 하나도 거침없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냥 오거든요. 옆에서 오는 사람들은 모두 두리번두리번거리고 간이 콩알만 해서 오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다 건너와서 물었어요. “스님, 스님! 스님네들은 이 강을 건너오시는데 겁이 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나는 이 강을 건너온 사이도 없는데 어떻게 겁이 나겠소?” 하더랍니다. 그거와 같이 우리가 지금 살아나가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 그냥 사는 바 없이 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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