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에 더 우선을 둬야 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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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국 사회에서도 불교인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노령화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교에 애들을 보내면 부처님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을 못한답니다. 그래서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너 부처가 되리라’ 하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제는 포교에 더 우선을 둬서 불교도 수를 늘려야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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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예,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천번 만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불교든 가톨릭교든 기독교든 다 타력 신앙으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는. 그러나 기독교를 다니든지 가톨릭교를 다니든지 불교를 다니든지 나는 상관 안 합니다. 단 하나 있다면 자기 주처를 똑바로 보고 자기 주처를 믿고 거기서 물러서지 말아라 이겁니다. 타의에서 구하지 말아라. 불교라는 것이 자의에서 구함으로서 모든 것이 불교지, 그 생명이 어디로 가느냐 이겁니다. 다 생명이에요. 생명을 떠나서 부처님이 어딨으며 생명을 떠나서, 각자 자기를 떠나서 어디 기독교가 있고 예수가 있고 하나님이 있느냐 이겁니다.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하나님이라는 것은 자기 완성이 하나님입니다. 자기 지혜가 바로, 바로 하늘님이고요. 일체 통신력이 바로 한울님이고. 그것이 삼합이 한데 합한 것이 바로 불교예요.
그런데 이거는 그냥 ‘나는 기독교니까’ 하고 말입니다. 걸상을 쪼르라니 동그랗게 놨는데, 요 걸상이 내 걸상이에요. 항상 내리고 타고 내리고 타고 하는데, 자기 걸상이 어디 따로 있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은 독불장군이 없다는 속담의 말이 있듯이 우리는 공생(共生)·공용(共用)·공체(共體)·공식화(共食化) 하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항상 그렇게 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겁니다.
여기 보십시오. 저런 나무도 그렇고 전부 일체 만물만생이 다 불자 아닌 게 없어요. 불자는 불자 그대로예요, 불자. 생명에 의지해서 다 여러분이 이렇게 말하고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식, 불자. 난 무식해서 이렇게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보십시오. 이 불자 중에서도, 도량에서도 이 신도 저리로 갈까 봐 걱정, 이 신도 다른 데로 갈까 봐 걱정, 이런 걱정은 왜 합니까. 안 오면 어떻고 온들 어떻습니까. 그것도 부처님의 뜻이다 이겁니다, 그거는. 나는 그래요. 나는 그전에 법당에서 설법할 때도 그랬습니다. “야, 나보다 더 휼륭한 데가 있으면 다들 가서 들어라. 다들 가거라.” 이랬습니다. 내 거짓말하는 게 아닙니다. 난 그런 것 한 번도 걱정해 본 일이 없습니다.
또 전국의 지원에서 불사들을 하는데 경기가 어려워서 못한다 이런 것도 난 걱정해 본 예가 없어요. 그냥 내가 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렇게 말이 많고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신도 안 올까 봐 걱정할 것 없어요. 왜? 한 사람이면 어때요? 한 사람만 사람이 돼도 이 세상을 손 안에 쥐고 다 해내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렇게.
그러니 불자가 많아야 되겠다 적어야 되겠다 이걸 떠나서, 내 가정에 어떤 일이 있는데 어떻게 관(觀)해야만 됩니까 이럴 때, 기도라는 건 없어요. 왜? ‘아, 내 주인공밖에 해결할 수 없어.’ 이렇게 하면 했지, 관하면 했지 ‘나를 잘되게 해 주시오.’ ‘이거 왜 안됩니까? 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이건 벌써 둘이 되는 겁니다. 이게 기도예요.
이게 기도지 난 기도라는 거는 언급하지 않거든요. 직접 관해라. 목마르면 직접 마셔라 이런 소립니다. 내가 자고 싶으면 그냥 자고. 야, 이 하늘이 열 쪽이 난다 하더라도 내가 자고 싶으면 자는 거죠. 아니 지금 죽으면 어떻고 이따가 죽으면 어떻습니까. 좀 이따가 죽은들 아 그깟 놈의 것 죽든 살든 어차피 이 낙엽도 떨어질 거, 귀찮게 그걸 왜 움켜쥐고서 죽을까 봐 겁내고 이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그 고를 생기게 합니까. 그러니 좀더 놓아서, 죽고 사는 데도 놓고 생사도 놓고 그렇게 갈 수 있어야만이 이 모든 것을 벗어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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