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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치 않을 사랑을 하고 싶어요

본문

질문

행복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더 나은 조건과 형상이 다가오기만 한다면 지금의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람을 언제든지 버리고 더 나은 상대에게 갈 수 있는 제 자신 안의 이기심을 보았습니다. 부모에 대한 사랑도 형제에 대한 사랑도 애인에 대한 사랑도 조건과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바꿔질 수밖에 없는 것이 중생의 마음인지요? 진정 변치 않는 사랑은 할 수가 없는 것인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그래서 항상 ‘착을 떼라, 떼라!’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았다 하더라도 그 자식에 착을 두지 마라, 또는 형제에 착을 두지 마라, 부부에 착을 두지 마라 하는데, 착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본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착을 떼어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뿌리를 싱싱하게 해 주기 위해서도 그렇고 깨우치게 하기위해서도 그렇고, 본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문제는 어떠한 것이냐?

물질을 보고 착을 둔다면 절대로 그것은 같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둘이 되기 때문에. 정말이지 부처님 법이란 죽는 것보다도 더 진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집착을 두지 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너무 사랑하기에 진짜 사랑을 알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면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사랑한다는데도 물질을 보고 사랑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사랑은 때에 따라서 벌이를 못해 온다거나 또 가정에서 부인이 아파서 드러누웠다거나 어떠한 문제가 생겨서 아주 발에 턱턱 채일 정도가 된다면 그것은 점차적으로, 불쌍하고 참 안됐다는 생각은 그지없지만 결국은 나중에 가서 ‘어서 그저 고생하지 말고 죽었으면….’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또, 벌이는 못하고 내내 몇년 간 놀아 보십시오. ‘저거는 아이구, 그냥….’ 이렇게 점차적으로 애정이라든가 이런 게 다 떨어지게 돼 있습니다. 이 문제들이 진짜 사랑을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진짜 사랑이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겁니다. 진짜 사랑이 뭔 줄 아십니까? 그래서 자비라고 했습니다. 그렇듯이 진짜 사랑을 알려면 내가 같이 들어갈 수 있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한 번 죽기 어려워라 했더니 두 번 죽기 어렵다.’ 하는 것이 같이 들기 어렵다는 얘깁니다, 상대를 두고 나를 두고 항상 이렇게 되니까.

물론 물질로써 상대는 상대대로 있지요. 일부러 둘이 아니라고 생각 낼 필요는 없어요. 그러나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나하고 인연이 돼서 아는 사람이나 친척간이나 자식지간이나 부모 자식, 그 상대와 더불어 이게 얼마나도 착이 붙어 돌아가는 문제인지 모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착을 떼라는 겁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돌아가는 거죠. 같이 돌아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거는 생각지도 못하고 물질을 가지고서 거기에 연연해 가지고 사랑한다느니, 또는 거기에서 착을 두고서 잊지 못하고 ‘너는 이렇게 이렇게 돼야 할 텐데….’ 하는 거죠. 아니, 나는 나대로 생각하고 그쪽은 그쪽대로에 생각하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쌍방이 다 다른 길로 가는 거죠. 문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라면 이런 게 있습니다. 자식이 자활할 때까지 아주 부모를 그리고 생각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거는 당연한 일이죠. 그러다가 어느 때 홀연히 자기가 자활하고 자기가 가족이 생기고 이렇게 된다면 예전처럼 그렇지 않고 은연중에 떨어집니다. 그 착이 떨어지는데, 다시 늙으면서 또 다시 그립습니다. 자기가 부모가 되니까 그리운 겁니다. 부모가 되고 늙어 가고 한다면 자기 그 부모를 다시 한 번 어린애가 되듯이 생각해 보는 거죠. 그때에 가서 또 그립습니다.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자식이 어렸을 때 자라면서 어머니를 생각하는, 부모를 그리는 마음, 그건 이루 말할 수 없는 겁니다. 또 부모가 자식을 생각할 때는 그건 쭉 계속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건 계속해서 여념이 없는 겁니다. 진짜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저 자식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마음을 부모는 항상 가지고 계시거든요. 그렇듯이 그러한 마음이라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이 육신을 붙들어서는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마음을 같이 해서 활력성을 넣어 줘야 몸과 마음이 자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자기가 스스로 마련하고 간단 말입니다. 그 몸을 붙들면 어떻게 하면 잘못 돌아갈 수가 있죠.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몸은 놔두고 항상 마음도 아예 펼쳐 놓는 겁니다. 펼쳐 놓되 항상 같이 있으니까 내가 가는 데에 그 자식이 가고, 그 자식이 가는 데에 내가 가는데 뭣 때문에 그것을 붙잡고 애탄지탄합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사람도 있죠. “야! 형제가 단 둘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부처님은 너무 사랑하는 까닭에 그 물질의 착을 뛰어넘게 하기 위해서 냉정하게 그렇게 얘길 했답니다. “언제 형제가 있었던가. 너의 형제는 벌써 이미 죽었고 너의 형제는 없느니라.” 하고요. 그런데 그걸 한번 뒤집어 생각하면 그건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형제뿐만 아닙니다. 요만치도 차이가 나지 않고 여러분과 똑같이 생각이 됩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우리가 그 모습을 바꿔서 바꿔서 이날까지 점차 바꿔서 나왔습니다. 바꿔 나오는 동안에 난 이걸 생각했습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모습을 바꿔서 갖다 놓으면 그 집 식구인 줄 알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가면 저 집 식구인 줄 안다 이겁니다. 전자에 살던 인연은 아예 까맣게 없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고 내가 아는 바로 봐서는 그렇게 뒤섞이다 보니까 내 형제가 아닌 것이 없고, 내 부모가 아닌 것이 없고, 내 자식이 아닌 것이 없고 전체 이것은 내 남편 내 부인 아닌 것이 없어요. 이렇게 사랑이 깊고 깊은 줄은 정말 미처 몰랐다는 생각이 예전에 덜컥 들었습니다. 그래서 막 울었습니다.

그리고 제일 사랑하는 거는 내가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이렇게 여직껏 끌고 온 나의, 바로 내 부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비교한다면. 그러면 내가 내 부모를 생각하듯이, 고아로서의 자식이 생각하고 찾는 그 마음, 또 부모가 자식을 잃고 찾는 그 마음이 동시에 같이 했습니다. 내가 수없이 모습을 바꿔 가지고 나오면서 나오게 된 그 동기를 볼 때 근본처인 부모, 그리고 그 근본처 부모는 멀리 있나 하고 찾았더니 글쎄 항상, 그 모습을 바꿔 가면서 수없이 거듭거듭 이렇게 모습을 바꿔 왔는데도 수없이 따라서 같이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 가짜 사랑만 알고 진짜 사랑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피가 한 방울이 흐르게 되면 강을 메우고도 남음이 있는 겁니다, 진짜 사랑의 눈물이란. 그런데 그 모습, 물건 아닌 진짜는 바로 여기 한 줄에 꿰여 있는데 왜 바깥으로 착을 두느냐 이겁니다. 그 모습을 따라 두느냐 이거예요. 진짜 자기 안에 있는데….

그거를 알면 바깥으로 그 모습을 찾아서 사랑하느니 뭘 하느니 그거 안됐느니 됐느니 하고 방황하고 다니지 않을 거다 이겁니다. 여기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믿음직하고 아주 태연하고, 태연한 거는 왜 그렇습니까. 참 떳떳하니까 그렇습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된다면 주위의 모든 환경이 떳떳하게 돌아가니까. 그러니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것은 자기가 같이 꿰어져 있건만 자꾸 마음이 달아나가니까 모습이 자꾸 방황하게 되고 같이 혼합이 되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모습도 같이 돌아가지만, 동체지만 이 마음이 동심이기 때문에 그 동심의 근본처가 바로 각자 수없이 거듭거듭 해 나온,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여러분의 그 부모인 것입니다. 그래 그 부모를 찾으려고 생각한다면, 그 부모는 자식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이 둘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근본처의 참나하고 지금 현대의 나하고 둘이 아니어서 항상 밸런스가 맞게 이렇게 돌아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바로 이 공부를 하셔야만이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사랑 사랑 사랑’ 많이 하시는데요, 조금만 불편하면 사랑한다는 소리가 쏙 들어가고요, “넌 나하고 살 수가 없어.” 하고 나옵니다. 이건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 덮어주고 서로 자기 탓으로 돌리면 모두 화목하게 되고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살다가 장애자가 돼서 밥을 떠 넣어 줘야 할 지경이 된다 하더라도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산다는 그런 이치가 생깁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자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가 뭔 줄 아십니까? 자비는 사람들을, 서로를 모두 편안하게 해 주면서 서로 고통을 면하게 해 주는 겁니다. 고통을 면케 해 주면 스스로 편안해지죠? 그것이 바로 자비예요. 얄팍하게 입술에 붙여 가지고 사랑 사랑 하는데 그런 사랑은 진짜 사랑이 못되죠.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변덕쟁이를 사랑이라고 한다고 할 수밖에 없죠. 금방 ‘사랑한다’ 그러고도 고질병이 들거나 병을 길게 앓는다면 남편이든 아내든 “아이고! 나는 너 때문에 못살아.” 하고선…. 그거는 나빠서 그런 게 아닙니다. 당연히 생활이 그렇게 만드는 걸요.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것을 입가에 붙이고 사랑 사랑 하지 마십시다. 결국은 말없이 행으로써 자비를 베푸는 것이 진정 사랑 아닌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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