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내는 만큼 행복해지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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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내는 만큼 행복해지면

본문

질문

스님, 욕심이라고 제가 스스로 생각하고 그렇게 믿어서 그게 욕심이 되는 것이지 욕심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살다 보면 더 욕심을 내게 되니까 되지 않는 것들이 자꾸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짜 마음을 비우고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다면 욕심내는 게 없으니까 행복해지겠지만, 저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장소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욕심내는 만큼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어떤 사람이 죽어서, 또는 잘못을 저지르고 죽어서 딴 모습으로 가면 시궁창도 돼지우리도 좋은 집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꽉 찼으니 볏짚단도 금으로 보일 수밖에요. 볏짚단도 금으로 보이고, 누렇게 마른 풀들도 금으로 방석을 해 놓은 건 줄 알아요. 그러니 좋아서 그리로 들어가면 짐승이 되는 겁니다. 욕심이 많은 고로 눈이 어둡고, 그릇된 행을 저질러서요. 똑바른 밝은 눈을 갖는다면, 한마음의 청눈을 갖는다면 여러분은 조금도 잘못됨이 없을 겁니다. 진짜 자유인인 것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이 몸을 가지고 만약에 진짜 사람이 못된다면 요다음에 어떠한 모습을 가지든 쳇바퀴 돌듯 또다시 돌아가야죠? 그러니 몇 바퀴나 돌아왔을까요?

재밌는 얘기 하나 또 해 드릴까요? 잘 생각하세요. 두 가지 여건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그 고기 한 점을 보고서 고기로 보았습니다. 한마음을 모르기 때문에 고기가 고기로 보이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 한 점을 주니까, 고기로 보는 게 아니라 사생(四生)의 그릇으로 보았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사생의 그릇 즉, 소 한 마리로 보았다 이 소립니다. 소 한 마리로 보이니까, 그 고기 한 점이 소 한 마리면 사생으로부터 모든 생명체들이 그렇게 많은 숫자가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생각 하나에 고기 한 점이 수십억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고기 한 점을 딱 보는 순간에 소로 몇 바퀴나 돌았는지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소로만 몇 바퀴 돈 게 아닙니다. 짐승으로 얼마나 돌았으며, 얼마나 쫓고 쫓기고 먹혀 왔으며 이렇게 돌아왔는가 하는 걸 한눈에, 한 찰나에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탁 입에다, 보는 순간 벌써 자기는 요리를 해치워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소 한 마리를 탁 해치워 버린 겁니다.

그렇게 소 한 마리를 잡아먹고 치워 버렸으나 자기가 됐더랍니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죠. 소 한 마리를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았죠? 이걸 깨닫지 못하고 이론적으로만 알아선 안 됩니다. 소 한 마리를 다 먹고 보니까 자기가 돼 버린 거죠. 자기가 됐으니깐 두드러지지도 않았죠? 자기가 또 거기서 소 한 마리를 꺼내니깐, 소를 꺼내도 소가 아니라 이제는 사람을 꺼내는 겁니다.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사람이 됐으니까 사람으로 생산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소를 넣었는데 사람으로 생산이 돼서 나왔습니다. 사람을 꺼냈어도 소의 사생이 들어있는 그릇이나 사람의 그릇이나 똑같이 그 사생은 마찬가지이나, 사람이라고 하는 거하고 짐승이라는 거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짐승은 새끼를 여러 마리 낳고 그럴 수 있지만 사람은 드물죠.

내가 각각 나라는 습성! 한마음에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이치를 모르고 각각 나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에 여러 숫자를 많이 낳죠? 알도 많이 낳고 새끼들도 많이 낳고, 이런 거는 벌써 내 마음속에 흐르는 피의 그 생명들이 내가 나라고 하고 싸우면서 서로 나오거든요. 서로 나와! 양보심이 없어요! 양보심이 없으니깐 그냥 나올 수밖에. 다섯도 좋고 넷도 좋고 열도 좋아요. 그러나 인간이라 하면 양보성입니다. ‘당신에게 모든 걸 다 주리다’ 하는 양보성이 있어요. 그래서 불성이 다 같은 생명이라 할지라도 독특한 생명이다 이겁니다. 고등생명이다 이거죠. 고등동물이다 이겁니다. 생명은 다 마찬가지지만, 차원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 자체가 그렇게 묘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한생각을 잘못하느냐 잘하느냐에 의해서 수억겁 광년을 거쳐 오면서 잠재의식 속에, 카세트에 얽히고설킨 게 그냥 몰락 벗어지는 겁니다. 벗어지느냐, 더 지지하게 짊어지고 다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뭐가 그렇게 원통해서 놓지 못하십니까? 우리가 뭐가 원통합니까? 이 몸뚱이가 공(空)해서 한 찰나에 살다가 한 찰나에 구름이 흩어지듯 흩어지는 몸뚱이, 내일 죽으면 어떻고 오늘 죽으면 어떻습니까? 나라는 욕심 때문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는 욕심 때문에. 나라는 욕심이 없다면 싱그럽게 사실 수 있을 텐데, 한 찰나찰나 사람이 넓게 볼 수 있고, 넓게 들을 수 있고, 넓게 일할 수 있고 지혜의 샘물은 골목골목에서 솟아 흐르듯이 좋은데 말입니다. 그 샘물이 싱싱하고 좋은데 그걸 모르시고선 자꾸 몸 하나에 끄달리니 전체에 끄달릴 수밖에요.

지금 여러분이 사는 겁니까? 여러분 몸속에 수만 생명이 들어 있으면서 오르락내리락, 피를 통해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고 살 속에도 오르락내리락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렇게 움죽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시나요? 그런데 어떻게 내가 제일이라고 할까요? 그 중생들이 다 받쳐 줘서 내가 이렇게, 부처가 눈코가 의젓하게 달리고, 손발이 있어서 평발을 해 가지곤 턱 딛고 다니는 건데, 그래 내가 제일이라고 하시겠어요? 누가 지금 그렇게 딛고 다니게 해 드리는데 상구보리라고만 하시겠습니까? 하화중생은 모르고요?

내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는 거고 부처가 있기 때문에 내 몸뚱이가 있는 겁니다. 길을 지나가다 보면 벌레도 자기가 살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동시에, 기댈 데가 있으면 좀 덜하고 기댈 데가 없으면 아주 역력히 자기 살 궁리를 합니다. 그런 거를 볼 때에 홀홀단신으로 모든 거를 집착하지 않고 일어선다는 것은 참 어려운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할 때는 어렵지 않습니다.

모든 점을 감안해서 귀도 떠야 하고 눈도 밝아야 하고 폭도 넓혀야 하니까 말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면 우리 머리 위에도 세계가 있고, 우리 발밑에도 세계가 있고, 사방팔방에 세계가 있습니다. 전체 ‘대천(大千)’ 하면 벌써 그렇게 있다는 말이고, ‘대천’ 하면 그런 세계가 헤아릴 수 없이 있다는 증겁니다.

그러니 요만한 한 지구의 우물에서 ‘우리가 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땐 참으로 답답한 때가 있습니다. 내가 답답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우물에서만이 자기 집이라고 하고, 자기 거라고 하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서로 뺏고 빼앗기고 하는 싸움을 계속 하는 그런 정신계의 문제와 육신계의 물질세계와 이 모두가 전쟁 아닌 전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새도 보십시오, 전쟁 아닌가! 내가 생각할 때는 거저 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돈을 갖다 주고 하라고 그래도 싫다고 할 텐데 말입니다. 이 문제들이 모두 겉면에 탐착을 해서 그런 거죠. 그것도 과한 욕심이죠. 진짜 욕심을 부리려면 우주세계 천차만별을 다 집어먹으려고 해야지 그것이 당연하겠죠. 영원치도 않은 걸 가지고 싸우긴 너무나 억울하지 않습니까? 고등동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하치않게 생을 버리다니 그건 말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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