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욕을 다 놔야 깨닫는지
본문
질문
좋은 차도 타고 싶고 또 좋은 집에서도 살고 싶고 직업도 좀 편하고 남들이 우러러보는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고, 부모님도 남들 부모님보다 좀 더 잘 모시고 싶은 이런 속된 마음에 휘둘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도를 깨닫는 입장에서는 물욕이라든가 이런 모든 걸 놔 버리고 살 수 있어야만 참도(眞道)를 깨닫는 것인지요? 이런 속된 욕심에 끄달려 다니면서도 어떻게 공부를 하면 깨달을 수가 있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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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내가 이렇게 보면, 누구든지 거기에 걸려 가지고 사람들이 공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는 거 잡지 않고 오는 거 막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물 흘러가는 대로 구덩이가 있으면 거기를 메워 가면서 넘어갈 것이고 앞산이 있으면 물은 돌아갈 것이고, 그건 자연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자연의 법칙이면서도 그건 ‘우연히’가 아닙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면서도 불교를 참되게 믿을 수 있으며 참선을 할 수 있으며 참나를 찾을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즉 말하자면 손 하나 움죽거리는 거 또는 생각 한 번 하는 거, 자고 깨는 거, 먹고 일하는 거, 하나하나 모든 것이, 나쁜 거 좋은 거를 떠나서 우리한테 주어진 대로 지극하게 사는 그 자체가 공했다는 얘깁니다. 불법이 따로 있고 생활이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물감을 삼십 가지를 갖다 놨는데 우린 지금 그 물감 삼십 가지를 놓고선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때에 따라서 흰 거 쓸 때도 있고 노란 거 쓸 때도 있고,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게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런데 노란색이 따로 있고 흰색이 따로 있고 이렇게 본단 말입니다. 우리 생활이 이게 전부 불법이지 생활 떠나서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쓰되, 우리 생활입니다.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쓰되 바로 내가 고정되게 하나만 쓰지 않으니 그 삼십 가지의 물감 속에 나까지 공했다는 얘깁니다. 쓰여지는 것도 공했고, 쓰는 나도 공했단 얘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이 물감 자체도 진짜 물감이 어떤 건지 이름 지어서 말할 수도 없고 또 삼십 가지의 물감을 쓴 나도 어떤 거 쓸 때 나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 공했고, 그러니 이 전체가 한데 합쳐서 모두가 공했다는 얘깁니다. 우리 생활입니다, 그게 전부.
‘어떤 거를 해야만이 내가 불법을 준수하고 믿고 숭상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다.'' 이런 게 아닙니다. 그대로 참선입니다. 그대로 찰나찰나 나투어서 화해서 돌아가는 게 그대로 참선이며 행선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난 게 그대로 화두입니다. 공했으면서 그대로 화두고 그대로 색이면서 그대로 공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떠나고 무엇을 안 떠나고가 있습니까? 도대체 부처님이 어디 고정되게 형상으로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이라고 이름이 돼 있는 것이 부처님입니까? 그러면 허공이 부처님입니까?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바로 부처님은 계신 겁니다. 여러분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화장실에 계신 거고 법당에 올라가면 법당에 계신 겁니다. 여기 와 앉아 계시니까 여기 계신 겁니다.
우리가 한생각을 이렇게 탁 부딪힐 때는 대뇌로 해서 통신이 전체로 돌아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습도력이나 원자도력이나 통신력이나 또는 무전력이라든가 이런 것이 다 같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여러 가지가 사람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이 도리를 모르고서 그대로 생각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나기 이전과 더불어 이전도 없고 지금도 없고 미래도 없고 이렇게 같이 들어서 돌아갈 수 있어야 우주와 더불어 같이 돌아갈 수 있는 거죠. 그럴 때에 비로소 우리는 한생각이 법이 돼서 그대로 이 세상에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그렇게 주어져 있기 때문에 지금 과학적으로도 물질과학 또는 유전자도 거기까지도 알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인간이 그렇게 많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서 진화돼서 나타난다는 그런 거까지는 알 수 있으나, 무전자로서 그렇게 없앨 수도 있고 있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자유성은 우리가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고 있다는 얘깁니다. 부처님의 도리를 알라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의 이 진리의 도리를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 참나를 알아 가지고, 세상 도리를 알아 가지고 우주의 도리를 안다면 ‘전체 둘이 아니라'' 이랬을 때, 우리는 우주도 발전함으로써 우리 지구도 발전할 수 있고 내 몸도 발전할 수 있고 내 가정도 발전할 수 있고 내 국가도 발전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면 물질로만 생각을 하시고 ‘아, 그건 그렇게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남이 하나도 모르고 있어도 모두 장본인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하나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딴 사람은 하나도 모르거든요.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설계가 나와야 이제 몇 사람 알게 되죠. 그게 완전히 이루어져야만 딴 사람들은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루에서 유루로, 유루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둘이겠습니까?
그러니 불교가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겉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합쳐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이게 불교입니다. 죽은 불교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름이나 찾고 죽으면 천당에 가자고 믿는 게 아닙니다. 우린 지금 이때,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나가는 것에 의해서 하는 겁니다. 지금 없는 게 후일에 천당에 어디 있겠습니까? 한 달 내내 일을 안 해 놨는데 새 달에 월급 탈 게 있을까요? 에누리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돈을 갖지 말랬나요? 살림을 하지 말랬나요, 고관직에 있질 말랬나요? 자기 분수를 지켜서 너무 과도하게 가지 말아라. 그러면 빠진다. 분수를 지켜라. 분수를 지키면서 너무 욕심 차리지 말고, 너무 욕심에 착을 두지 말고 나라는 데 착을 두지 말고 모두가 나 아님이 없다고 그렇게 둥글게 살아라. 그런데 억지로 가는 거를 붙잡아서 내가 권리를 가지려고 한다면 그 자긴 죽는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분수를 지키면서 둥글게 삶으로써 우리는 가는 거 잡지도 않고 오는 거 막지도 않고 스스로 둥글게 지혜롭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도구를 삼아서 그 한마디 한 행이 그대로 법이 되고 그대로 생활이 되고 그렇게 생동력 있는 삶의 보람을 느낄 거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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