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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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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길, 인간의 길

본문

질문

요 근래에 SBS 방송에서 “신의 길, 인간의 길”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인간이 본래 신인데, 인간이 만든 신에 의해서 인간이 구속되어 살아가는 모습들이 못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자각의 종교인 부처님법을 만난 저희들 중에도 진정한 부처님의 삶과 깨달음의 길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세속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타력의 종교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믿고서 기복과 발복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자신의 근본을 믿고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기복으로만 헤매이게 되는 것일까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말끝에 이 말이 지금 생각납니다. 나는 그전에 이런 일 때문에 많이 울었습니다. 왜 열 사람이라면 꼭 다섯 사람이나 여섯 사람만 완쾌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하고 항상 떨어지는가. 그것이 내 탓이라고 돌리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말도 못합니다. 이렇게 똑같이 불쌍하고 그런데 왜 한꺼번에 다 똑같이 되지 않느냐고 울었죠.

그런데 하루는 달이 그믐달이었는데 어느새 초승달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쳐다보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달이 둥글었다가 반쪽이 됐다가 점점 점점 줄어들더니 나중엔 아주 실낱같이 적어졌다가 또다시 둥글어지고 그러더군요. 새삼스럽게 지금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예전에도 있었건만 그걸 쳐다보고 ‘옳지, 세상은 이렇기 때문에 진리가 끊임없다고 말을 했구나. 그 사람네들이 그렇지 못한 거를, 거기에 어떠한 문제가 걸려 있는 거를 내 어찌하겠는가? 보름달이 있으면 그믐달이 있듯이 마음과 마음이 차이가 나고 그렇게 되니 어찌하겠나?’ 하고 그땐 눈물을 닦으면서 싱긋이 웃고 들어갔습니다만 웃음은 잠시 잠깐이고 생각에 잠겼었습니다.

지금도 답답한 게 아니라 담담합니다. ‘세상이 왜 이렇게 요지경 속으로 돌아가나!’ 하는 생각에서 담담하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답답해하고 방황하는 것도 아니고 불쌍해서 애를 쓰는 것도 아니고 안 불쌍해서 덜 애쓰는 것도 아니고 쾌활한 것도 아니고 그냥 항상 담담하단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언짢지는 않으나 ‘하이구, 요지경 속이구나!’ 이러고 어떤 때는 길을 가다가도 그냥 너털웃음으로 웃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어떠한 웃음이겠습니까? 웃음도 천차만별입니다. 우스워서 웃는 웃음이 있는가 하면 기가 막혀서 웃는 웃음이 있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자에 형상을 모셔 놓고 제자들을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또는 선방을 만들어 놓고 앉아서 너희는 시간을 정해서 해라 하고 가르친 것도 아닙니다. 나는 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자유스럽게 놔두면서도 자기가 스스로 계율을 지키게끔 이끌어 주는, 바로 그런 길을 부처님께서는 인도하셨던 겁니다. 몸으로써 고행을 한다고 해서 부처를 이루고 또는 고행을 안 한다고 해서 부처를 못 이루는 건 아닙니다. 첫째 마음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이 참 중요하죠. 이런 문제가 역력하게 있습니다. 집안에서 한 사람이 그 도리를 알았는데 그저 언짢은 말은 하지 않고,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가 막말도 뱉지 않습니다. 자기 말이 한 번에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도리를 아는 사람의 한생각은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그것을 자비하게 돌려서 생각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 향기로운 마음의 에너지는 한 방에 있는 자기 식구들을 얼마나 밝게 비춰 주겠습니까?

이렇게 성스럽고 이렇게 묘하고 이렇게 생활에 즉각적인, 즉각적으로 감지되는 생활 속의 근본적인 진리인데도 우린 그걸 모르고 항상 그저 산에 올라가서 빌고, 일 주일이고 삼 주일이고 백 일이고 천 일이고 목욕재계하고 그저 멸치도 안 먹고 고기도 안 먹고 남편도 멀리 해 가면서 올라다니는 사람이 지금도 많습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가정을 돌보지 않으니까 하는 소립니다. 내가 없는데 어떻게 부처가 있습니까? 내 가정을 파괴하고 어떻게 부처님을 이룬다고 합니까? 내 앞의 것을 모르고 어떻게 저 먼 데 것을 잡습니까? 그것도 다 욕심이거든요. 허황된 욕심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래서 이렇게 가르쳐 주셨죠. ‘문전에서, 너희들이 정성을 들이려고 이고 나올 때 벌써 정성은 받았느니라.’ 그게 무슨 소린 줄 아십니까? 자기가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부처도 일체 신도 알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알고 있으니까. 그 뜻을 왜 모르십니까? 예전에 그렇게 명백하게 가르쳐 주셨는데 그 뜻을 왜 모르십니까? ‘네가 아는 것이 부처가 아는 것이다. 일체 신이 알고 있다. 일체 신이 알고 있고 일체 심(心)이 알고 있고, 만물이 같이 돌아가고 이렇게 행하고 있거늘 어찌 그것을 모르고 너희들은 타의에서 바라는 게 항상 그렇게 많으냐?’ 하시고 말입니다. 네가 해 먹지, 네게 있으니까 네가 퍼다 먹지 왜 남의 걸 바라느냐 이겁니다. 네 안에 바로 네 것이…, 이 우주 공간에 꽉 찬 것이 다 네 건데 어째서 남한테 바라는 마음을 갖느냐 이거죠. 그런 마음을 갖기 때문에 네 것이 다 못되느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배가 고프다 하는 것은 밥을 못 먹어서만이 배가 고픈 게 아닙니다. 일체 만법의 생활이 어떤 게 부족하든지 다 배고픈 건 배고픈 겁니다. 그러면 배고파도 내가 배고픈 걸 알기 때문에 배가 안 고프게 할 수 있다는 거를 또 알아야 되죠. 그것은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면 벌써 그런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 내가 배고프면 벌써 여기서 해 주겠지.’ 이런 생각이 안 들어도 벌써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건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도 없어요. 그리고 편안한 겁니다. 자기가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서 돌아오는 것을 왜 내가 걱정을 하고 ‘배가 고파! 배가 고파! 부처님, 배 좀 부르게 해 주시오.’ 하고 애원을 하고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그렇다면 영원히 노예가 돼서 항상 배고프다고, 항상 남의 집 머슴 노릇만 할 겁니다. 남을 주고 살아야지 만날 노예가 돼서 남의 심부름이나 하고 얻어먹기나 해서 되겠습니까? 이건 비유입니다만 진실입니다.

모두가 살아나가는 데 급급해서 그냥 애를 쓰고, 이름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이론을 배우려고 애를 쓰고, 지식으로 사는 거 이런 거. 남의 거를 갖다가 빼서 어떡하든지 내 걸 만들어서, 그저 좋게 얘기해 주면 될 줄 알고요. 그렇게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진실하고 그 진실한 도리를 앎으로써 진실하게 행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뜻을 지니고, 진실한 그 뜻을 지녔기 때문에 자기가 익게 되고, 익게 되면 고개가 숙여지고, 고개가 숙여지면 언제나 나 아님이 없고 전부 둘이 아니게 되고, 저절로 그렇게 되는 그런 도리를 우리는 모른다는 얘기죠.

하여튼 바깥으로 끄달리지만 않으신다면 빌지 않을 겁니다. 또 안으로도 빌지 않을 겁니다. 왜? 안으로 둘로 본다면 기도를 해야 하지만, 둘로 보지 않는다면 ‘관(觀)하라’ 이런 소립니다. ‘색(色)과 공(空)이 둘이 아닌 까닭에’ ‘마음과 내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 소립니다. 마음과 이 몸이 둘이 아닌 까닭에 이것도 아니고 몸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다 이런다면 그 무엇이 있었던가? 그냥 주먹으로 이걸 하나를 집어서 한 번 친다면 쩡 울리는 그 뜻! 두 손으로 그냥 두 개를 집어서 팍! 친다면 번쩍 불이 일어나는 찰나 이겁니다, 모두가. 이 공부가 참 재미있고, 생활 속에서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찰나의 생활을 그냥 여여하게 사시라고 그렇게 가르쳐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빌어먹으려고만 하고 빌고 있으니 이걸 어떡합니까, 글쎄.

이렇게 밝고 밝은 세상에서 우리가 왜 그렇게 미(迷)하게 돌아가야만 합니까? 그러니 불법을 배운다는 분들이 아직도 정신을 깨지 못하고 자기의 옷깃을 여밀 줄 모르는 그런 분들이어서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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