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에 치우치는 것 아닌지?
본문
질문
스님께서 저희들에게 가르치는 이 마음공부가 어떻게 보면 체계도 없고 용(用)에 치우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질문에 대해서 스님의 답변이 상대에 따라서 다르시고 주인공을 믿어서 고통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는 측면을 경학을 공부하시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용에 치우치게 보인답니다. 이 점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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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내가 여기서 여러분한테 가르치는 것은 세 가지를 종합해서 가르치는 겁니다. 여러분은 가정을 가지고 있고 애들을 가지고 있고, 부모를 모시고 남편을 모시고, 아내를 데리고 이렇게 가정을 가지고 사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참으로 여러 가지로 고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때에 따라서 첫번에는, 당신의 주인공이 있으니깐 주인공이 이끌어 가고, 주인공에 의해서 생각이 나고 주인공이 당신을 형성시켰고, 당신의 주인공이 운전수와 같이 당신을 끌고 다닌다 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 생각으로 ‘내가 이럭할까요 저럭할까요.’ 하고 나한테 묻지 말고 꼭 당신의 주인공에 맡겨 놓고 오관을 통해서 이 세상 판단을 해서 딱 결정을 해서 나가는 게 그것이 바로 법이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용이라는 거는 자기가 생각해서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그대로 용입니다. 그러면 용을 가르치고 마음의 도리를 가르치고, 참선을 가르치고 이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세 가지를 한데 포함해서 지금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연세가 얼마입니까? 애든 어른이든, 늙었든 젊었든 간에 이 모습이 없으면 도대체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거 듣는 거, 냄새 맡는 거 맛을 아는 거, 부닥침을 아는 거 뜻을 아는 거, 이 여섯 가지의 문제를 다 여러분은 살아 있으니깐 그걸 알고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살아 있지 않고는 그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그냥 동시에 가르치는 겁니다, 이건. 급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리벙벙하시겠지만 나중에 보면 그게 얼마나 고맙고 편리한지 모르는 겁니다.
때로는, 즉 말하자면 용은 바로 마음에서 용이 나가는 거고 마음이 있기 이전에는 바로 참나가 있기 때문에, 삼합이 한데 동시에 공존하기 때문에 용이다 마음공부다, 참선이다 좌선이다 할 게 따로 없다 이 소립니다. 때에 따라서는 나도 두 가지, 세 가지 얘기를 하죠. 근기에 따라서 여러분 에게 “알았다”고 그냥 그렇게 대답을 하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 이 주인공이 있는데, 주인공이 모든 일체를 이끌어 가는데 주인공에 다 맡겨 놓고 당신 마음 나오는 대로 해.” 하고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당신이 알아서 하지, 왜 날더러 물어?” 이렇게도 합니다. 이 뜻을 가만히 생각을 한다면 전체 우리가 지금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내 몸을 이끌어 가고, 내 모든 전체를, 사회를 국가를, 이끌어 가는 데 거기에 모두 달렸다는 겁니다. 아주 묘한 뜻이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이 딴 스님네하고 다르게 가르친다 이런 점도 있겠죠. 그러나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당장 급하면 급한 대로 여러분이 생각해서 해결을 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해결을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해결이 되고 안되고, 요것을 종합해서 볼 때에 해결을 하는 것도 그놈이 하는 거고, 해결을 못하는 것도 그놈이 하는 겁니다.
항상 여러분한테 ‘마음은 체가 없어서….’ 이렇게 얘기를 하죠. 그 말이 그게 뜻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여러분한테 이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말 자체의 뜻을 한데다 떨어트린다면 여러분은 한생각에 이루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 도라는 것이 이루는 것만 도가 아니라 능력을 기르면 내가 용을 하는 건 스스로 부수적으로, 그냥 그대로 부수적으로 오는 겁니다. 용을 일부러 배우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요. 그대로 생각나면 움죽거려지는 것이 용인데 뭐가 그게 용을 따로 배우는 겁니까, 네?
그래서 옛날에 조주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까 “있다” 했습니다. “개가 불성이 없습니까?” 하니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요것이 무슨 뜻이냐? 조주 스님이 대답하신 거는 대답을 있다고 할 때는 없는 거하고 포함해서 한 거고, 또 없다고 했을 때도 있는 거하고 포함해서 대답한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러면 너희의 마음에 따라서 그것은 그대로 법이니라, 여여하니라 하는 겁니다.
옛날에 어느 부모가 계신데 “어머니, 저 어린앨 낳고 피비린내가 있고 그러니깐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죠.” 그러니까 “그렇지.” 그렇게 대답했다 이겁니다. 그런데 어느 자식이 또 한 가지 묻기를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어린앨 낳아서 경사를 봤으니깐 제사를 더 잘 지내야죠.” 그러니깐 “아유, 그렇고말고!” 이거는 누구의 생각입니까? 이거는 생각하기에 달린 겁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자식에게 거부를 하고 “얘, 그럭하지 마라. 이럭해라.” 하면 그 자식들이 더 곤란할 거고 그 도리를 몰라. 스스로 알게 만들기 위해서 그런 거죠. 부모의 돌아가신 날을 음미하는데 뭐가 그렇게 어린애를 낳아서 부정이 있고, 어린애 안 낳았으니깐 부정이 없고, 무슨 그런 게 어딨습니까? 자기의 정성입니다, 그게. 그것이 근본, 아주 깨끗한 마음으로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깨끗한 자식으로서 물 한 그릇을 떠 놓고 향 한 개비와 불 하나를 켜 놓고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 정성이다 이겁니다. 그게 진실 아니겠습니까? 그거를 가르치기 위해서 조주 스님도 그렇게 양면을 다 그렇게 허술하게 체계 없이 말을 대답을 한 거죠.
그러나 이 참선에는 체계가 있어서는 선이 아닙니다. 체계가 없이, 체계가 없는 것이 즉 참선입니다. 체계가 없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여러분의 진실한, 지금 해 나가는 여여함이 그대로 바로 참선이요, 행이요, 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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