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도 없다고 하지만…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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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공간도 없다고 하지만…

본문

질문

예전에 ''생명의 실상''이라는 책을 조금 읽어 본 적이 있는데요, 우리의 실상은 원래 시간과 공간도 없는 자리라고 하지만 분명히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이 진리에 눈을 뜨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우리가 냉정히 판단해 볼 때 옛 사람도 없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습니다. 우리 근본자리는 그대로 묵묵히 작용하면서 영원한 그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살아 있기에 ''옛 것이다, 옛 것이 아니다.'' 그런 언어가 붙지 않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살아나가다 보니까 이 육체로 인해서 옛날이다 지금이다 조상이다 후손이다 말들을 이렇게 해 놓고 있는 거죠. 그리고 작년이다 재작년이다 올이다 내후년이다 하고 말들을 해 놓은 거죠. 우리 인간이 살아나가면서 천차만별로 살아나가자니 문란치 않게 질서를 지켜야 하겠기에 우린 이름을 지어 놓고 그렇게 하고 있죠. 그래서 말하자면 지속된 꿈이지마는 지속된 실상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죠. 지속된 삶의 근본을 알고, 그 근본의 도리가 생로병사를 통한 고집멸도 사제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화라는 과정에 의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어떠한 진화력을 얻어서 탈바꿈을 하고 자꾸 지속된 한 발을 떼어 놔야겠기에, 그 과정은 고가 없이는 성립될 수가 없다고 해서 고집멸도라고 말씀을 했겠죠. 사계절이 그대로 돌아가듯이 인간도 추위를 무릅쓰고, 또는 더위를 무릅쓰고, 봄이 오고 가을이 오고 떨어졌다 피고 떨어졌다 피고 이렇게 지속되는 나날을 그대로 하면서 거기에서 계발을 한다면, 나무와 나무를 접을 붙이듯 열매와 열매가 모양이 달라져서 나오게 만들고, 그 연관성으로 인해서 진화력으로서 창조력을 키우고, 그래서 오늘날의 우리는 정신 개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생명의 실상이 그대로 마음으로서, 한마음으로서 존재가 되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촛불이 있다 할지라도 성냥을 그어서 갖다 대지 않으면 불이 되지 않듯이 그거는 누가 켰든 간에 내가 켜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켜진 겁니다. 그것이 바로 촛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이죠. 그러니 안팎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작용하는 것이 전부 바로 나의 그 생명의 실상이 있기에, 거기는 없다 있다 하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이기에 그대로 여여하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실상은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우리가 꿈에도 몸은 누워서 잠을 자고 있지만 자기라는 그 자체는 그대로, 생각한 대로 움죽거리고 있죠. 꿈을 꿨다 안 꿨다 하는 것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지마는 항시 밤낮이 없이 움죽거리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죠. 잠을 자도 잠이 없고 낮에 이렇게 돌아다녀도 돌아다닌다는 자체가 없고. 여러분은 몸이 다니니깐 내가 다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나 아닌 참나가 있기에 바로 내가 움죽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꿈에는 꿈대로 내가 움죽거리는 게 아닌가요? 바로 나 아닌 내가, 그 분신이 움죽거리고 있는 그건 환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실제적인 환상입니다. 생각 없는 일을 하는 법이 없고 생각 없는 일을 설계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자기가 나기 이전에 인연의 소치로 만난 인연들이죠.  꿈에서는 우리가 하루를 지낸다 하면 일 년을 지낸 듯이, 하룻밤에 일 년을 지낼 수도 있고 삼 년을 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룻밤에 수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살다가 끝을 마치지도 못하고 어떠한 문제가 생겨 가지고선 깨다 보면 새로 한 시다 새로 두 시다 세 시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됩니다. 깨 보니깐 그렇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룻밤에도 몇 차례씩 시간과 공간이 없는 세계에 도달해 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 시간을 따지면서 또 살아나가고 있습니다. 따질 필요도 없는데 왜 그걸 따져야 하느냐? 한두 사람이 산다면 따질 필요도 없지만 천차만별로 모두 여러 생명들이, 아니 여러 물체들이 살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시간도 정해 놓고 달도 정하고 해도 정하고 날도 정했죠. 이것을 정하지 않으면 질서가 문란해지고 또는 충성이나 효도도 없을 것이고 아주 고등 동물의 행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질서를 지키게 해 놓은 거죠.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과거에도 현실에도 미래에도 우주 삼세를 두고 말할 때, 우리가 수없이 헤아릴 수 없이 몸바꿈을 했다 할지라도 바로 ''과거''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그런데 그 과거에 수없이 탈바꿈을 해 가지고 자기 형상을 형성시켰건만 자기는 그것을 아예 모르는 채, 지금 현실의 형성된 나가, 바로 내 모습이 난 줄 알고 시간만 따지고 급급해서 날짜만 보고 애를 쓰고 사는 것입니다. 참자기의 근본이 있는 줄은 모른 채 자기가 그냥 자기라고만 하고 그렇게 살다 보니까,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지키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은 거죠.

옛 물도 없고 옛 산도 없고 옛 사람들도 없다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언어가 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없는 가운데서 우리는 작용하고 이렇게 그냥 그대로 자기의 마음의 지혜에 따라서 인연의 업보를 지을 수도 있고 인연의 업보를 부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인연의 업보를 짓지 못하는 것은, 없애지 못하는 것은 자꾸 자기라고 하기 때문에, 자기가 한다고 하기 때문에, 매사를 자기가 한다고 그러기 때문에 그 업보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모습은 지속될 수 없지만 참자기는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나는 개별적인 나가 아니라 포괄적인 나입니다. 유생 무생이 한데 합쳐지고 일체 만물이 다 합쳐진 이 내공에 의해서 모든 것은 자기가 할 탓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깐 아니다 기다 이 언어가 붙지 않는 이 자리에, 꿈이다 생시다 이러한 게 붙지 않는 자리, 즉 말하자면 시간과 공간과 그 말이 붙지 않는 자리, 생사윤회도 붙지 않는 자리, 그 자리에서 그대로 여여하게 내가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하달을 할 수 있고 상신할 수 있고 한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 능력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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