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기도하지 말고 관하라 하시는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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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도하지 말고 관하라 하시는지요

본문

질문

현대불교신문의 ‘길을 묻는 이에게’ 코너를 열심히 챙겨 보고 있는 독자입니다. 스님의 자상한 가르침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근데 궁금한 것은 기독교의 주님이나 불교의 부처님이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이 되는데, 스님께서는 왜 기도하지 말고 관하라고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내가 무식한 말을 또 해야 되겠군요. 큰 연자나 맷돌이 돌아갈 때 그 맷돌 가운데에 심봉이 딱 꽂혀 있는데, 그게 인제 우리들의 핵심이나 마찬가집니다. 심봉이 꽂혀 있는데 그 심봉으로 인해서 전부 돌아가지 않습니까? 물건을 넣어도 갈려 나오고, 모든 게 다 갈려 나오죠. 이것이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간다고 해 보십시오. 그리고 시공을 초월해서 그냥 재료가 항시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갔다 나갔다, 들어가면 나오고 들어가면 나오고 이렇게 한다고 해 보십시오. 어떤 거 넣어서 갈려 나올 때 나라고 할 수 있겠나. 그래서 그 핵심 자체는 갈려 나오든 안 갈려 나오든 그냥, 핵심은 그냥 있는 겁니다. 그 만 가지를 다 갈아 내면서도 끄떡없이 주어져 있는 자체가, 그게 부처입니다.
 
우리들 마음이 부처, ‘일체제불의 마음이 내 한마음이다.’ 이랬죠?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주인입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자성부처, 자성불이다 이렇게 하고, 기독교나 가톨릭교에서는 ‘주여’ 하는 겁니다. 주인! 그래서 마음의 그 주님은 내 마음 가운데 있지 바깥에 있는 게 아닙니다. 내 몸뚱이는 기독교나 가톨릭교에선 종이라고 하고 이 불교에서는 시자라고 합니다. 다른 게 하나도 없는데 모든 사람의 마음의 역량의 차원에 따라서 모두 각자 주어지는 거죠. 그래서 지금 기독교나 불교나 모두, 즉 기복으로 모두 이끌고 가는 겁니다, 기복으로.
 
어느 곳에서도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은 자기한테 있지 딴 데서 찾으면 아주 멉니다. 자기한테서 자기를 못 찾으면, 기독교인들은 자기한테서 자기가 주님을 못 찾으면 아니 됩니다. 주님은 주님대로 자기 자성불은 자성불대로, 생명의 근본이 불이니까. 주인이 옳으냐, 불이 옳으냐. 불은 아까의 그 심봉 자체를 불이라고 하고, 그 맷돌과 심봉과 다 같이 돌아가는 거는 주인공입니다. 공해서 돌아가는 거.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 한 가지로서 우리가 일상생활을 다 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꿰뚫어서 알아야 이게 감응이 되고, 알게 되고,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다면 스스로서 벌써, 하늘이 무너져서 쪼개져서 가루가 돼서 내려온다 하더라도 싱긋이 웃을 겁니다, 아마. 싱긋이 웃을 거예요. 하늘을 받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싱긋이 웃어지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꽃을 한 송이 들었을 때에 가섭이 싱긋이 웃었듯이.

그래서 기도란 말을 안 합니다. 기도를 한다면 상대가 꼭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관한다고 하는 거는 자기가 자기를 그냥 관하는 겁니다. 이건 관찰하는 겁니다. 내가 거기다 맡겨 놓고 관찰하는 겁니다. 그리고 실험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꾸 체험하고 나가는 게, 그냥 실생활 속에서 그렇게 하고 나가는 게 행선입니다, 행선. 일하면서 하는 게 행선, 누워서 하는 게 와선, 서서 하는 게 입선, 앉아서 하는 게 좌선, 이것이 다 그냥 같이 돌아가는 것이, 그냥 생활 속에서 하는 게 그냥 참선이라고 합니다. 생활 참선이죠, 그러니까.
 
모든 거를 그렇게, 다리가 아프거나 어디가 아파도 말입니다, 이게 이 콩깍지가 덜 익어서 할 때는 콩깍지 뿌리를 그냥 놔두고 익혀야지, 뿌리를 그냥 끊어 버리고선 익히려면 그냥 말라 버립니다. 더 떨어지지 않습니다. 콩깍지하고 콩 알갱이하고요. 익지도 않고요. 그러니까 항상 거기다 맡겨서 뿌리가 성성하도록 하면서 이 콩깍지가 익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면. 그래서 이 콩깍지가 그냥 시들고 그 뿌리가 말라 들어가면, 익지도 않아서 마르면 얼른 죽지도 않고 아픕니다.
 
그러니까 그저 모든 걸 주인에게 맡기는 것이 바로 뿌리에 물 주는 거와 같습니다. 뿌리에 물을 주면 그 잎새도, 즉 말하자면 열매도 싱싱하게 익고 익어서 말라야 이것이 톡 건드리기만 해도 탁 떨어지죠. 몸뚱인 몸뚱이대로 떨어지고 의식은 의식대로 떨어지지 않습니까? 그래야 자손들도 속 썩이지 않고, 나도 편안하고 자식들도 편안하고 이렇게 해야만이 공덕이 되지 아니, 남한테 이익도 못 주면서, 내 몸뚱이한테도 이익을 못 주면서 어찌 공덕이라고 하겠습니까.
 
이 주인은 영원한 거고 내 몸뚱이는 한계가 있는 거니까 이 몸뚱이는 항상 끌려다니는 시자와 같단 얘깁니다. 그러니까 그 시자를 끌고 다니는 주인에게 그 시자는 항상 그저 ‘당신만이 나를 잘, 건강하게 끌고 다닐 수 있어.’ 그게 아주 돼야 됩니다. 옛날에도 얘기가 있었지만 달구지를 치느냐, 소를 치느냐. 달구지를 끌고 가는 소를 쳐야 달구지를 끌고 가지 아니, 달구지를 치는데 소가 어떻게 갑니까? 그런데 기복은 모두 달구지를 치는 겁니다, 지금. 기도를 하고 온통 야단법석들을 하는 것이 바로 달구지를 치는 격입니다. 진짜 실천하는 데에 그 소를 치지 못하고 말입니다.

하여튼 지금 말씀드린 것대로 열심히 실천을 해서, 어떠한 문제가 생기고 애고가 생긴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말고 거기에 맡겨 놓으십시오. 그러고 지켜보십시오. 그러면 알 바가 있을 테니까. 참 묘한 도립니다, 이게. 아주 광대무변한 도립니다.

마음으로도 안 가본 곳은 갈 수 없는데…
문) 스님께서 법문 중에 마음으로 집에 갔다 오라고 그러셔서 해 보니까 진짜 마음으로 집에 갔다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익히 살던 집이고 이미 가 봤던 곳이니까 생각만 하면 갈 수 있는데 가 보지 않은 곳은 마음으로도 갈 수가 없는 것 아닌지요?
답) 마음으로 그 집을, 항상 보던 데니까 금방 빛보다 더 빠르게 가 볼 수 있죠. 이 마음은 체가 없어서 지구 바깥으로도 훨씬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내면세계의 나부터, 주인공을 믿고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스스로 보게 되고 스스로 듣게 되고 스스로 알게 된다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부터 그렇게 해 나가신다면 그렇게 스스로 알게 될 겁니다.
 
예전에 외국으로 법회를 하러 갔다가 만난 어떤 외국 사람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그분이 어딜 가면 좋다 그래서 “나도 거기 갔다 왔어.” 그랬죠, 농담으로. 그랬더니 어떻게 언제 갔다 왔느냐 그래요. 그래서 “나, 벌써 당신이 그렇게 아는 것처럼 나도 그 너머도 갔다 왔고 집을 산비탈에다 매달아서 지어 놓은 것도 멋있고, 또 그 아래 내려가면 물이 흐르는 것도 물론이거니와 나무가 그냥 구성지게 한 벌판이 다 이렇게 둥그렇게 돼 있는 것도 참 좋고, 그 가는 길이 좋고 그렇더라.” 이랬더니 아, 자기가 아는 것대로 인제 얘기를 하니까 어떻게 갔다 왔느냐고, 벌써 갔다 왔느냐고 그러면서 아주 그냥 기가 탁 죽잖아요. 그래서 “아니야.” 그러고선 그냥 말았어요. 근데 그분이 아는 거는 그분이 알기 때문에 내가 알고 내가 알기 때문에 그분이, 그 모든 것을 얘기 안 해도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볼 수 있다고 해서 공부가 아니다. 이건 과정이다. 안다고, 본다고 하지 마라.” 하고선 얘기한 예가 있습니다.
 
그렇게 내가 어디를 이렇게 한다 하면, 예를 들어서 달을 내가 구상해서 본다 이럴 때 그 한쪽만 보는 게 아니라 천체 볼 수 있다는 거, 천체 탐험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말로만 듣지 말고 실천을 자기가 해 봐야 되고 지금 세상에는 앉아서 뛰어야지 서서 뛰는 사람은 전쟁에도 못 이겨요. 정치도 못하고. 지금 여러분이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살림을 하는 것도 그렇고 전체가 그래요. 나에게 전체 근본이 직결돼 있다고 그랬죠? 바로 여기 지구의 주인이기 때문에 전체가 그냥 근본자리에 직결돼 있다니까요. 예를 들어 말하자면 전기 가설이 돼 있는 자가발전소나 한가지죠. 전력이 나가는 자가발전소. 그와 같다 이거죠.

그러니까 근본이 되고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모든 거, 보는 거, 듣는 거 또는 남의 속을 알 수 있는 거, 과거를 알 수 있는 거, 현재의 모든 것을, 우리가 과거의 업보가 있는 모든 것을 탐험할 수 있고 또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올 수 있는 그런 거, 다섯 가지를 법바퀴라고 그럽니다. 법바퀴, 불바퀴, 물바퀴. 물바퀴는 지혜바퀴. 불바퀴는, 즉 말하자면 공생할 수 있는, 불생불멸 하는 그런 바퀴. 또 우리 지금 ‘법바퀴’ 이러는 거는 우리가 한생각을 하면 한데 떨어지지 않는, 실천에 옮기는 그런 법바퀴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이 공부는 정말이지 실천하는 공부기 때문에 여러분이 안 하면 아니 되는 그런 공부죠.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태어나면 물질세계에서 문명이 발달이 되고 과학이 발달이 되고 모든 게 발달이 됐지만 거기에까지는 미치지 못할 겁니다. 그래서 물질과학과 무심과학이 동시에 같이, 유무가 같이 한데 합쳐서 우리가 돌아가야만이 이 세상이 원만하고 평화롭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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