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에도 단계가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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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마음공부 하는 데도 단계가 있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부하면 좀더 빠르게 나를 보게 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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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물론 계단 없는 계단이 있습니다. 먼저 자기가 완전히 죽었을 때 자기가 탄생을 하는 겁니다. 자기 껍데기를 벗고 말입니다. 다 태워 버리고. 그랬을 때에 오관을 통해서 거기 말리지 않고 그 오관을 자기가 부릴 때 그때 도력이라고 합니다. 그때에 지혜와 더불어 선정과 자비가 포함해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해도 그때에 나를 세워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관을 통해서 부릴 때, 즉 말하자면 오신을 부릴 때 결국 그것은 자기가 다시 보림하려고 그걸 체험하고 돌아가면서 또 놓게 됩니다.
그런데 ‘나 한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나 한 번 죽기는 쉽더라. 나 한 번 죽기는 붙들고 갈 거라도 있어서 그래도 쉬웠는데 두 번 죽기 어렵더라.’ 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한 번 죽어서 탄생을 해서 어린애 임신해서 탄생은 됐으나 도대체 물리를 몰라요. 어린애가 나온 것처럼. 다 자라야 어른 노릇을 할 텐데. 그래서 어른 될 때까지, 성장할 때까지 보림을 다시 해서 놓고 성장을 시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그래 성장을 다 시킨 뒤에 또 더불어 같이 죽기 어려워라 하는 겁니다. 같이 죽어서 그게 다 됐다면 더불어 같이 나투기 어려워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열반까지 이끌어 가는 둘 아닌 한 길인데, 길 없는 길을 발 없는 발로 디딜 줄 알아야 하는 것이 원칙인데다가 손 없는 손으로서 닿을 데 없는 닿을 데 있는 데까지 아니 닿는 데 없다 이겁니다. 그르고 옳은 게 하나도 없어요. 만약에 그르다 옳다 이거를 분리한다면 반드시 이건 어긋납니다. 둥그런 그릇에 네모난 뚜껑 덮는 거나 한가지죠.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죠. 어느 사람이 와서 “이것이 옳습니까?” 하니까 그르단 말은 하나도 안 하거든요. “어떤 게 정법입니까?” 이렇게 말을 하니까 “응. 그것도, 그것도 옳다.” “저 얕은 산은 저 높은 산하고 어떤 게 차이가 납니까?” “얕은 산도 옳고 높은 산도 옳다.” 그래서 한 번 죽기는 어렵다 했는데, 한 번 죽기는 쉬운데 같이 죽기는 어렵거든요. 그건 또 둘째라. 전부 같이 나투기 어렵다 이겁니다. 이 뜻을 말로만 휑하게 아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문제예요. 거기에는 티끌 하나 붙질 않아야, 그르고 옳은 게 붙질 않아야 합니다. 이런 공부 하는 사람들은 마음에다가 ‘아 저건 틀리다, 저건 옳다.’ 그런 걸 가지면 절대 이건 할 수 없어요. 미지수의 그것을, 한 구녁도 없고 티끌도 없는 그걸 한숨에 찰나에 뚫을 수는 없어요. 물론 그렇게 해 나가다가 점차적으로, 점차 뚫을 수 있을는지는 모르죠. 허나 미해질 수도 있거든요. 하도 따지니까. 왜 그렇게 달기는 좋아하는지.
우리가 한번 ‘야, 참 너 만나서 좋구나.’하는 그 소리가, 아주 웃으면서 그 소리 한번 하는 게 몇 근이나 될까요. 나는 만약에 그르고 옳은 것을, 그래서 ‘선을 지킨다면 선의 업이 있고 악으로 간다면 악의 업이 있다. 선과 악을 다 놔라.’ 이러고 싶은 거예요. 잘되고 못된 거를 다 놓지 않는다면 그건 치우치게 되죠.
우리 지구도 부동한 자세로서의 그 긍지를 가지고서 지축이 흔들리지 않고 있으면서 사방에서 조여드는 그 자체로 인해서 자석과 같습니다. 어느 거 하나 붙어도 타 버리고 말죠. 타 버리는 관계상 살아난다 이겁니다. 이 유생 무생이 다 이렇게 해서 살고 있는 이 원리를 왜 모릅니까. 우리 인간 하나 하나도 혹성이다 할 수 있죠. 별성이다 이겁니다. 한 사람의 한 점의 마음의 불덩어리가 온 우주 세계를 다 집어삼킬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집어삼킬 수 있는 그 오묘한 마음을 가지고 만날 저울질만 하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를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나와서 저울질하다 간다면 저울질밖에 못하지 어떡합니까. 차원에 따라서 끼리끼리 모두가 그렇게 모이는 거죠, 뭐. 이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 세계를 우리가 보이지 않는다고만 하지 말고 내 내면을 볼 수 있을 때, 내공을 볼 수 있을 때 홀연히 그 내면으로 하여금 천리도 요 눈앞이죠. 조그마한 고 불씨 하나가 삼천대천세계를 집어삼킨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저것 따지고 뭐 남는 게 있어서 몽탕 다 태워 버리나요? 본래 태워 버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모르니까 그러는 거죠. 마음으로 그렇게 쌓아 놓으니까. 무조건이지, 뭘 이렇게 달고 저렇게 달고, 그게 도대체 몇만 근이나 된다고.
나는 그전에 어느 스님한테 가서 “스님! 얼마나 가면 죽겠습니까?” 하니까 “눈 뜨고 푹 자면 돼. 죽는 거야, 그게.” 이 말씀 한마디가 참 실감났어요. 눈 감고 자는 거는 자는 게 아니죠. 눈 뜨고 자야, 얻다가 시장바닥에 갖다가 팽개쳐도 우뚝우뚝 서게 되죠. 잘된 거 못된 거를 남의 탓으로 돌려서도 아니 되고, 또는 잘된 거 못된 거를 건져 들어도 아니 되고, 잘된 거 못된 거를 일일이 그걸 계산해도 아니 되고…. 그런 겁니다. 그래서 똑똑하더라도 좀 겉으로는 무식한 척 둔한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 공부는 둔하지 않고는 도대체 될 수가 없거든요. 벌써 오관을 통해서 이 사량으로 전부 알거든. 이 머리로 다 알아 버려요. 감각이니 지각이니, 보는 거 듣는 거 이게 기계적으로 다 있는 거거든, 이게. 언제 그놈의 오는 거, 헤아릴 수도 없는 게 그냥 스쳐 가는데 언제 그놈의 걸 세웁니까.
그저 모든 게, 이 세상에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그건 자기 탓이에요. 이 세상에 자기가 나왔기 때문에 자기가 봤고 자기가 거기 갔기 때문에 들었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말다툼을 하게 되고 자기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게 그렇게 상황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게 되면 모든 게 내 탓입니다. 못난 내 탓. 잘나지도 않았고 못나지도 않았고 그저 그대로 내 탓이다 이겁니다. 그 내 탓이라는 한마디의 뜻이 눈 뜨고 자는 일이에요. 가정에서도 무슨 언짢은 일이라든가 부부지간이라든가 자식지간이라든가 모든 일에 대해서 말을 참 이익하게, 상치 않게 말을 해 줄 뿐 아니라 말을 해서 상할 일이라면 하지 말고 안에다 굴려서 놔야 된다 이겁니다, 내공에다. 모든 걸 내공에서 나오는 건 내공에다 다시 놔야 됩니다. 잘된 거는 감사하게 놓고 안된 거는 안돼서 맡겨 놓고. ‘나는 하겠다, 못하겠다. 이런 것이 공부다.’ 이런 거 다 놔야 됩니다. 급하다는 거까지도 놔야 돼요. 그렇게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나온 자리, 내가 낳기 이전 자리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전 자리를 알게 되면 이전도 없고 이후도 없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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