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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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불법을 공부한다 하면서 행보다 말이 앞서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까웠는데 사실은 저도 그러고 있더라고요. 누가 뭐라 하면 '둘이 아니잖아.' 하고 알음알이로 쉽게 말은 하지만 정작 저 자신도 행은 안되거든요. 열심히 해서 이 도리를 알고 싶은데 어찌 공부하면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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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사람마다 누구나가 다 둘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을 우리가 둘이 아닌 것이라고 하는 데서 둘이 아님을 또다시 알아야 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것입니다. 둘이 아닌 것은 아나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보통 흔히 말을 하기를 "둘이 아닌데 뭘 그래? 뭐 할 말이 그렇게 있다고…." 이렇게들 시원하게 아주 말로 해 버리는데 물론 물도 얼음도 둘이 아닌 거는 알죠. 그 얼음과 물이 둘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그 씀씀이를 하고 돌아가며 배우는 이치, 상황에 따라서 물을 크게도 쓰고 적게도 쓰고, 흘러내리는 물이라도 좀 더 우리가 생각해 봐 가면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있고 이렇듯이, 항상 그 물에 의해서 말갛게 씻을 수 있는, 씻는다고 해서 또 물에 항상 물건을 씻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요. 항상 말갛게 씻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 자세는 우리가 선지들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입니다.
아무리 내가 알아도 선지들의 그 큰 발은 너무 커서, 작다 못해 티끌 안에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말은 안 해도 마음으로 '에이, 그까짓 걸 가지고….' 이렇게 아주 가볍게 생각을 내는, '아이고, 그럼 그렇게 되어 있는 거를 뭘 그래? 뭐,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말이 그 말인 걸. 그게 바로 그 도리인 건데, 뭐.' 이렇게 그냥 알아 버리는…. 쉽게, 아주 간단하고 가볍게 그렇게 안다는…, 안다는 그 생각은 좀 더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도 그런 말이 있죠. 선지들께서 말씀하시기를 "얘야, 내가 지금 급하게 오던 길에 아주 무겁고 요지부동한 돌이, 돌계집이 어린앨 낳았어. 그런데 지금 해산간을 안 해 줄 수도 없고 해 줄 수도 없고, 어떡하면 좋겠니? 너희들은 이 뜻을 어떻게 해석을 할 수 있겠느냐?" 하고 "이 한 길을 일러 봐라." 했습니다. 그랬는데 "그것은 방편으로써 말씀하시는 거." 하고선 가볍게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더랍니다. 돌계집이 따로 있고 애 낳는 게 따로 있겠느냐고 말을 그렇게 가볍게 해 버리기 쉬운 얘깁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그분이 그 말씀을 한 말하고 그 대답하는 사람이 그 대답한 말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알고 대답하는 거하고 모르는 걸 대답하는 말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이 공덕이다 또 공덕이 못 된다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마는 "부처님은 자비로우셔서 사람을 죽이지도 않고 살생도 안 하고 해하지도 않고 모든 일을 착하게만 하시는데, 범부들은 항상 죽이고 먹고 이렇게 살생을 해서 우리는 항상 지옥에만 갈 처지인데 부처님께서는 어찌 범부와 부처와 둘이 아니라고 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했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지금 해가 만물을 다 비춰 주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고 저 서산에 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니라." "그러면 그렇게 뜨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고 지는 것도 중생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이 거기에 부처입니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주장자 들고 있던 걸로 탕탕 발목을 치더랍니다. 그런데 법상을 쳤는데 왜 발목을 쳤습니까? 그 한 대목이 관문입니다. 이 한 구절이 바로 일차적인 관문을 통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상을 쳤는데 어째서 발목을 쳤다 하느냐? 이 소식을 한 구(句) 일러 봐라 하는 뜻입니다. 이 모두가 우리가 방편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실천이자 현실이자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실입니다. 깨달은 분이 없다고 하는 말, 바로 그것을 듣고 귀동냥으로 해서 사량으로 알고 이론으로 알고 그래서 "아, 그거 그냥 둘이 아닌데. 그냥 무(無)야." 하고선 이렇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래서 이 만법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있다. 우리가 자도 숨을 쉬고, 깨도 숨을 쉽니다. 이게 그대로 참선입니다. 우리가 사량적으로 잘못해 놓고 또 뒤에 생각을 하고 거론을 하고 이런다면 그것은 또 걸리는 법입니다. 잘못한 데다가 또 잘못이 또 거듭거듭 붙어요. 만약에 가정에서 잘못하든 어디에서 잘못하든 잘못해 놓은 거라면 그것 또한 자기 성품에 의해서 그것이 요리 용(用)을 하고 조리 움죽거리고 조리 생각해서 하고, 이런 것을 일일이 걸린다면은 그것은 더더기가 붙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잘못해도, '이건 주인이 하는 거니까. 다 놓으라고 그랬으니까 잘못해도 이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이렇게 회피를 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도리가 쉬우면서도 까다롭고 까다로우면서도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렇게 말을 하니까 쉬운 걸로 생각을 하시는데 "마음은 허공을 갈 수 있고 허공을 돌 수 있고 이 지구를 벗어날 수가 있지만 육신으로서는 벗어날 수도 없고 또 이 온 누리를 돌 수도 없는 것입니다." 하고 말을 하니까 그게 쉬운 줄 알고 그냥 그러시는 분들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우리가 나 하나 깨닫는 데는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것입니다. 그건 왜? 모든 게 진심스럽고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모든 게 우리가 지금, 그전에도 말했지만 억겁을 거쳐 나온 그 습이 지금 현실의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모두 찰나찰나 놓고 가면, 우리는 한꺼번에 놔지는 게 아닙니다. 찰나찰나 놓고 가다가 보면 몰락 다 놓게 되는 것이죠. 또 그걸 놓고 깨닫는다고 해도 깨달아서도 찰나찰나 금방 그것이 다 체험이 가서 성불의 길로 드는 게 아닙니다. 찰나찰나 가면서, 아까 얘기했듯이 씻고 또 씻고 씻고 또 씻고 가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죠.
사람이 지혜가 넓으면 저 바다의 물처럼 더러운 물 깨끗한 물이 다 들어가도 받아들일 수 있는 큰 손이 되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한다면 고인 물에 아마 더러운 물이 들어간다면 왈칵 뒤집히듯 할 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생각해서 지혜를 넓히고 응용을 하더라도 그 하나하나를 모두 이것이 어디서 나고 드는가 하는 참구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봄을 기다리는 나무처럼 꾸준히, 항상 밑 빠진 구멍에 모든 것을 놓는다. 믿고 놓는다. 줄창 말을 하지만, 항상 먹고선 싸지 않으면 우린 부작용으로서 죽습니다. 싸야 삽니다. 싸야 살듯이 놔야 삽니다. 몸이 있을 때에 공부를 안 하면 세세생생에 여러분이 가슴 찢고 울고불고 참, 창살 없는 감옥처럼, 그리고 끌려가는 것처럼 자유스럽지 못하게 항상 지낼 터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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