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으로 알면 놓는 것이 더 쉬울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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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놓는다는 것이 사실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론으로라도 그 이치를 알고 배운다면 놓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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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여러분이 말로 배우려고 하고 글로 배우려고 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 항상 자기 공한 주인공, 즉 말하자면 자기 몸이 공했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 자기가 공했기 때문에 세상도 공하듯이 전체가 공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든 것을, 내가 배워야겠다는 생각은 쑥 빼놓으시고 항상 놓는 습을 가지셔야 합니다.
억겁을 거쳐 오면서 우리가 이 사람으로서 등장을 했습니다. 그럼 사람으로서 이렇게 형성된 지금 이 시점에서 억겁을 거쳐 온 그 자체의 습이 지금 현실의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각자.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시점에서 내가 공한 줄 알고, 공한 데서 나오는 거 바로 공한 나 자체가 화두인 줄 알고 거기다가 모든 것을 놓는다면, 진심으로 맡겨 놓을 수 있다면, 바로 거기에서는 자기 자신의 일체 생동력 있는 생수물이 자기에게 맛을 보일 수 있고 상봉할 수 있겠지마는, 우리가 배우려고 한다거나 경이 자기를 보고 자기가 경을 보고 학으로다가 말로다가 이론으로다가 이렇게 배우려고 한다면, 우리는 백네 날이 가도 공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이 밝고 아주 화창한데 꽃이 피었다고 합시다. 봄이 돼서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이 떨어지면 왜 여러분의 마음이 허황되고 또는 쓸쓸해지고 외로워지고 그러겠습니까. 꽃이 핀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꽃이 진 것도 좋은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요 그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좋은 것이겠습니까. 꽃이 피는 것도 아니요, 지는 것도 아니라면 그 가운데 무엇이 나한테 일체 이익하게 할 수 있는가. 일러 보실 수 있다면 일러 보십시오. 우리가 여태 놓는다 안 놓는다 말 없이 여여하다는 말을 했지만, 그런 문구 자체를 내 스스로서 함이 없이 이를 수 없다면, 저 아주 날은 창창하지만 안개와 아지랑이가 끼어서 앞을 가릴 수밖에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른 거와 같은 겁니다.
그래서 옛날의 선지식들은 "이 눈을 봤느냐? 봤으면 일러라!" 하고서 주장자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르지 못했을 때는 "그 참, 날은 어둡구나!" 하고선 그냥 그렇게 한마디 한마디 읊으시고 내려가고 이러한 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런 걸 떠나서, 우린 근본적으로 말과 그 흉내 내는 거를 떠나서 진실한 '참나'를 알고자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어떠한 '이 뭣고.' 화두나 '무'자 화두나 '시삼마' 화두를 쥔다고 해서 그것을 들면은 드는 대로 벌써 상대방에서 나를 들게 해 줬으니까 의식적으로 벌써 그걸 알고 있습니다. 또 내가 공해서 없다는데도 불구하고 거기다가 또 받아서 그것을 들고서 온종일 헤매도, 해는 점점 저물어 가는데 온종일 들고 헤매도 도대체 알 길이 없어서 그만 저녁에 옷을 벗게 되는 그런 이치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 몸이 없으면, 공한 몸이 없으면은 또 무효입니다. 더하고 덜함이 없어서 무효니만큼 우리 몸이 있을 때 바로 그 이치를, 부처님이 바로 마음을 전달하신 그 뜻을 알면은 부처님의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에 바로 내 마음부터 헤아릴 줄 알아야 부처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얘깁니다, 몸이 무너지기 전에. 무너지면 더하고 덜함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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