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성이라는 말을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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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불교에서 견성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일반적으로 견성을 했다는 스님들의 행적이나 어록, 또는 경전에서도 내면의 이끎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견성할 수 있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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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우리가 경전을 파악해 가지고서 모든 것을 알고 그 경전을 증득한 거하고, 내 마음을 증득한 거하고는 다릅니다. 경전을 증득한 거는 말이나 모든 것은 다 유창해도 결정적인 문제에 가서는 해결을 못해요.
그러니까 생활 속에서 '모든 일체를 다 거기서, 고놈이 하는 거니까 고놈이 해결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아라 이겁니다. 그리고 '고놈이 있다는 것은 고놈이 증명할 수 있다.' 이러고 다 놓아라. 그 나를 끌고 온, 나를 진화시킨 그 장본인에게. 그래서 부와 자가 상봉을 하게 돼요. 이렇게 둘이 아니게. 그래서 내가 나를, 과거의 내 조상을 발견한 거나 마찬가지죠.
그전에도 내가 이런 말을 했죠. 묘지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아들의 묘지고 하나는 자식의 묘지다. 그런데 날더러 묻기를 '아비가 자식한테로 가면 자식이 하나가 돼 버리고, 자식이 아비한테로 오면 아비가 하나가 돼 버리니, 그것은 무슨 연고냐.' 하고 묻더라 하는 거를. 그랬을 때에 그것이 왜냐. 마음이라는 건 체가 없는 거죠. 일을 할 때는 온 정신을 다해서 거기 일을 하니까 자식이 하나가 되고,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두루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렇듯이 예전에 어느 스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날더러. ??이 대 경을 전체 위로 꿰고 바로 꿰고 이렇게 했는데 실질적으로 닥친 거를 어찌할 바가 없더라.?? 하고요. 그 마음의 도리와 경과 선과, 인제 교가 둘이 아니게끔 된 거는 다 모두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굴왕신이 내려서 집을 못 짓는다든가 손이 있어서 이사를 못 간다든가, 이 터가 나빠서 못 짓는다든가, 산소 자리가 나빠서 못 쓴다든가 이런 문제에 닥칠 때는 어찌해 볼 수 없는 거예요. 그건 꼭 당하고야 말죠.
그러나 법의 능력이 그렇게, 나 자체와 나 자체가 상봉을 했다면 그건 선과 교가 둘이 아니에요. 모두 일체가 둘이 아니죠. 그리고 그대로 자유스러운 겁니다. 그대로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말고 싶으면 말고, 짓고 싶으면 짓고 말고 싶으면 말고. 그렇게 자유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은 남한테 화두를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세상이 벌어졌지, 내가 없는데 무슨 종교가 있고 부처가 있고 세상이 있느냐. 나부터 알아라 이겁니다. 사대 성인들이 다 너부터 알라고 그랬죠? 너부터 믿으라고 그랬고.
예전에 어느 스님이 고치지도 못하고 막 쓰러지는 병이 동네에 발생을 하니까 도대체 그냥 앞으로 들어가질 못하고 뒤로 물러서서 생각을 하니까, 자기가 이날까지 배우고, 이날까지 이론적으로는 다 배우고 알았는데 실질적으로 닥치니깐 어렵더라 하고는, 그냥 나 하나 버리면 되지 하곤 그냥 거기 들어섰다 이겁니다. 그러니 '나'가, 내가 문젭니다. 나 버리는 데의 문제라고요.
지금 살아가는 것도 고정됨이 하나도 없죠? 변하고 부서지고 모두 고정된 게 하나도 없죠? 그게 그대로 공한 겁니다, 그대로. 그대로 공했기 때문에 내 몸도 그대로 있지 않고 공해서 돌아가죠. 고정되게 그냥 있지 않는 겁니다. 말하는 거나 가고 오는 거나 만나는 거나 다 고정됨이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나라는 걸, 어떤 걸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이름을 가졌을 때 내가 그 이름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언니라는 이름, 오빠라는 이름, 형이라는 이름, 아우라는 이름. 또 사회에 나가서 장가들고 시집가면 며느리라는 이름, 딸이라는 이름, 또는 아내라는 이름, 남편이라는 이름, 아버지라는 이름 뭐, 천차만별로 이름이 많죠. 그 이름 따라서 아버지 노릇 할 때에 나라고 할까요, 남편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아들 노릇 할 때 나라고 할까요? 그러니깐 전부 공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그 도리를 알면, 없다 하는 걸 알면은 죽는 것이다 이 소리예요.
모두가 고정됨이 없다는 걸 알고, 뭣이든지 심봉이 끼어져야 바퀴가 굴러가죠? 맷돌도 심봉이 끼어져야 맷돌이 굴러가듯이 차도 심봉이 끼어져야 바퀴가 돌아가죠. 그렇듯이 인간도 이 심선이 서야 모든 게 일체 그걸 따라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을 그냥 선으로, 주장자로 세워 놓고 모든 걸 거기다가 맡겨 놓고, 거기서만이 이열치열로서 들어가면 없어지고 들어가면 없어지고, 입력이 돼서 나오는 데다가 다시 넣으면 앞서 게 없어지고 또 넣으면 또 앞서 게 없어지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가 셋이요 셋이 하나라. '하나' 하고 '둘' 하면은 벌써 '둘' 할 때 하난 없어져요. 그러곤 하나예요, 그게. '셋' 해도 하나 둘이 없어지고 셋이 그냥 하나죠. 그러니까 전체 포괄적인 한마음이란 얘깁니다. 그러니 삼 배를 올리고 백팔 배를 올려도 아무 소용 없고, 모든 것은 이 주인공에 모든 것을 한마음으로 둥글려서 일 배를 올려도 만 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이런 거를 이렇게 알았는데…. 내가 뭐 일 배만 해도 만 배가 된다는데….' 이러고 해서는 안 됩니다. 경우에 따라서 삼 배를 올릴 때는 삼 배를 하고 바쁠 때, 무슨 경우에 따라선 또 일 배로 하고…. 자연적으로 이렇게 돌아가게끔 해야 된다 이겁니다. 그렇게 공해 버렸으니까 나라는 조건이 아무것도 없어요. 본래 없잖아요. 자기라는 게 없다는 걸 알겠죠? 그래서 무(無)라는 소리를 한 원인이 거기에 있다 이겁니다.
"개가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하니까 "없다." 하더니 또 한 번 물어보니까 또 있다, 있다 없다를 다 떠나면, 이거 보세요. 아버지가 어린애를 하나 생산하는데 엄마 아버지가 딱 다 없어지고 애만 생산이 돼서 나왔거든요. 그거 앨 쓴 사람은 다 없어지고. 그래서 전자와 전자가 작용을 하면은 그 양자의, 즉 말하자면 질량은 다 없어지고 에너지 광력만 나와서 큰 덩어리를 이룬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까 이 나와 나가 그 작용을 하는 거를 다 놔라 이 소립니다. 전자와 전자가 작용을 하는 거를 다 놓으면은 거기에서 에너지 광이 일어난다 이겁니다.
하여튼 모두 여러분이 지금 여여하게 살면서도 사는 게 없다. 여여하게 사는 반면에 여여하게 살기 때문에 무다. 없다.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으니까 무다. 그러니까 한마음 주인공이다 이겁니다. 한마음 주인공에다 무조건 믿고 무조건 거기에다가 놔야 된다. 맡겨야 된다. 무조건 맡기지 않는다면은 어떻게 그것이…. 화살을 쏘는데 똑바로 탁 들어가 맞아야 되는데 화살이 일로 가서 맞고 절로 가서 맞는다면 어떻게 그게 되겠습니까. 전체를, 원을 이렇게 해 놓고선 전체를 그냥 중심을 꿰뚫는 건데, 꿰뚫는 공분데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뭣고? 이놈이, 이럭하는 놈이 뭣고?' 이거는 10년 20년이 가도 어렵습니다. '이놈이 모두 집어먹고 가는 놈이로구나. 그리고 내놓는 놈이고 들여놓는 놈이고, 들여놓고 내놓는 거를 다 하는 놈이로구나.' 하고 그대로 그냥 인정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야 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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