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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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묻는 이에게는
큰스님 법문 중에서 발췌하여 답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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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본문

질문

친구의 권유로 선원에 등록한 지는 3년 가까이 되었으나 인연이 안 되어 외면하고 있다가 4개월 전부터 우연한 기회에 이 공부의 길로 들어서서 지금은 큰스님께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마음 주인공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선법합창단에도 들었고요. 다름이 아니고 ‘삼세가 둘 아닌 노래’에서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받아 공심이면 자유권을 자재한다.” 이런 가사가 나오는데 그 뜻을 알고 싶습니다.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이 몸속에 있는 모습들을 본다면 조그마하니까 하등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들 하시겠지만, 그게 만약에 이렇게 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를 꺼내 놓았는데 크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징그럽고 무섭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거를 다 거쳐 나왔단 말입니다. 그게 거친 인연들이에요. 우리가 한때는 그 모습을 가지고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 보면 자꾸자꾸 지혜가 생기고 회개를 하게 되고 또 건너뛰게 되고 이렇게 하죠. 그런데 저 아래 축생들은 그냥 먹고 살기 급해서, 그렇게 먹고 사는 것만 알지 한 번쯤 그런 것을 생각해 볼 여유가 없다는 얘기죠. 그래도 사람은 고등 동물이기 때문에 부처 될 가능성이 99%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똑같이 부처가 있는데 왜 그러면 이렇게 사단이 많으냐. 똑같이 부처라 하더라도, 뿌리는 같으나 모습이 다르고, 하는 차원이 모두 다르고, 살아 나온 기술이 다르고, 모든 게 자기의 습대로 하고들 산단 말입니다. 과거로부터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현실에 가지고 나왔으니까요. 모습도 삶도 또 권세도 다 가지고 나오거든요. 가지고 나와서 살고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내가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러나 벗어난다는 말조차 없이 그대로 내 몸에서 이 모든 생명들을 둘 아니게 조복을 받는다면, 내가 마음대로 마음을 내는 대로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라도 이 보살이 응신(應身)으로 화(化)해서 모든 걸 이익하게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거를 생각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완성을 하면 이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들이 자기가 스스로 벌써, 모두 부하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죠.

여래의 마음은 공심(共心)이다. 여래의 몸은, 즉 말하자면 공체(共體)다. 공체기 때문에 크죠. 여러분이 볼 때는 사람 하나지만 공체이기 때문에 크단 말입니다. 그리고 공용(共用)을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안에서도 공용이요, 바깥에서도 공용입니다. 이런 얘기 곧잘 하죠. 우리가 물을 한 그릇 먹었다고 하면, 이것을 내가 먹은 겁니까? 이건 내가 먹은 게 아니라 여기서 목마르다고 달라고 그래서 준 거예요. 줬는데, 준 사람만 먹는 게 아니라 전부 다 같이 나누어 먹죠. 이 공부하는 사람들의 의식들이 이렇게 나누어 먹게 된 동기를 알게 되면 동시에 그냥 한마음이 돼 주죠. 지나가다 보면 하다못해 소나무도 말을 하고 돌도 말을 하는데, 이 속에 의식들이 얼마나 빠릅니까.

그러니까 이 물을 남이 볼 때는 나 혼자 먹었어요. 그런데 먹은 사이가 없다. 이 물은 내가 먹은 사이가 없이 더불어 같이 공식(共食)을 했다 이런 뜻이 나오죠. 공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먹는 것만 공식이 아니라 이 모든 거, 돈 벌고 이렇게 하는 것이 모두 공식입니다, 그게. 같이 움죽거리죠, 이 몸도. 지금 자기가 그냥 보고 듣고 이렇게 움죽거렸다 하시는 분들도 있겠죠. 그러나 아닙니다. 그건 모든 부서에서 작용을 해 주기 때문에 움죽거리는 겁니다. 어느 한 부서에서만 움죽거려 주지 않아도 그냥 폐인이 돼 버리고 말죠. 모두가 그렇게 움죽거려 주는 걸, 본래 그렇게 움죽거려 주고 같이 해 주고 있는데,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얍삽해서 이거를 죄다 가르는 거죠. 자기 자불이 그렇게 있고 자불로 하여금 마음이 의식하고 통해서 같이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이 그렇게 해 주질 않으니까 같이 조복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냥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인연 받은 대로 그냥 하는 거죠.

그러니까 운명이나 팔자나 이런 거를 면할 수가 없다 이러는데, 이 공부는 팔자 운명도 없고 고(苦)도 없다, 이렇게 나오죠. 고라는 건 집착만 없으면 모든 게 없어요. 집착! 집착을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이거는 물을 먹었으니까, 내가 물을 줬으니까 저 물 대신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또 ‘내가 해 줬으니까 좋게 되겠지.’ 하는 집착, ‘부처님한테 뭐를 놓았으니까 뭐가 오겠지.’ 하는 이런 집착, 이런 집착들이 모두 자기를 멸(滅)하게 못 해 주는 겁니다. 어차피 물을 한 그릇 떠다가 부처님한테 놓았으면, 예를 들어서 얘깁니다. 부처님한테 놓았다 하면 뭐, 몇 억을 갖다 놓았다 하더라도 한 사이 없이 했다면 그것이 그냥 그대로죠, 그냥. 그러니 돈보다도 수없는 이 허공을 다 준대도 가볍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생기는데도 불구하고 준 거 생각을 하거든요.

그리고 어떠한 일이 생기더라도 왜 집착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지 그것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몇 알갱이나 산다고 집착을 합니까. 그리고 미워하고, ‘너로 인해서 망했다.’ 이러고. 간혹 ‘너로 인해서 흥했다.’ 이럴 수도 있죠. 그것도 집착입니다. 모두가 집착이에요. 그래서 고·집·멸·도, 아닙니까? 고라는 거는 이름이에요. 고라는 것은 집착이 없다면 멸한다, 이런 뜻이에요. 멸하면 도다, 이거예요. 간편하죠, 아주. 우리가 이렇게 해도 여기 걸어서 들어올 때 내 발자국을 짊어지고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죠. 한 발짝 떼어 놓으면 한 발짝 없어지는데 왜 없어진 그 발자국에 집착하느냐. 없어진 발자국에 집착을 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 살면서 그냥 ‘요거는 요게 잘못됐는데….’ ‘이런 게 잘못됐다.’ ‘이건 정말 날 무시하고 이렇게 이렇게 됐다.’ 이런 생각이 들면 그게 영 없어지지 않죠. 없어지질 않는 그것이 집착이에요. 무상하게 살면 안 되나요? 우리가 ‘이것도 한 발자국 떼어 놓는 거와 같구나. 이것도 그런 거지, 뭐. 살다 보면 그런 거지.’ 그러면서 그저 이해해 주는 그런 마음…. 그러니까 내 마음으로 잣대를 들이대지 말고 남의 마음을 살펴 주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쁘다 좋다를 떠나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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