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자손을 도울 수 있는지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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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자손을 도울 수 있는지요

본문

질문

부처님을 믿지는 않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로또에서 1등을 한 분들 중 39%가 조상의 꿈을 꾸고서 당첨이 됐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정말 돌아가신 부모와 조상이 살아 있는 자손을 돌보고 그럴 수 있는 것인지요. 저도 조상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지금의 궁핍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옛날에는 자손들을 육 형제나 오 형제나 이렇게 많이들 낳아도 낳는 대로 저거 했지 어린애를 지우거나 이런 법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느 사람이 칠 남매를 두었는데 그 칠 남매를 두고 농사를 지어서 가르치고 뭐 하고 하려면 얼마나 피땀이 나왔겠습니까. 부모들이 위로는 다 좀 가르치고 그러다가 밑으로 막내를 가르치질 못했어요. 인제는 쇠약하고 저거 해서 위로 큰형들이 좀 도와서 해야 할 텐데 도와서 하질 않았기 때문에 밑으로는 잘 가르치지도 못하고, 농사를 조금 지어서 그냥 먹는 판이어서 부자가 될 수가 없었죠. 그렇게 살다 보니까. 그래 남의 집의 품을 살고 이렇게 하다 보니깐 아주 가난해서 부모는 인제 다 돌아가시고 제가끔들 사는데, 막내는 아주 더 가난하고 어렵고 그래도 그 위로는 괜찮게 살고 그랬는데 괜찮게 사는 형이 아우를 조금도 돕질 않거든요.

그러니깐 가난한 사람이 형네 집에 가면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차라리 안 가는 거죠. 그냥 굶더라도 안 가고 있는데 인제 어머니 제삿날이라든가 이런 때는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깐 인제 자기가 먹는 냉이를 캐다가 말갛게 씻어서 보리죽을 쑤든 쌀죽을 쑤든 뭐 이렇게 죽을 쒀 가지고는 자기 먹을 거를 퍼서 인제 어머니나 아버지한테 이렇게 놓는데, 그것도 상에다 받쳐서 놓을 데가 없어서 장독자리에다가 이렇게 그냥, 장독자리도 뭐 원만히 돼 있겠습니까만 그 위에다가 이렇게 놓고선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하고 그리면서 이렇게 못난 아들 때문에 한번 어머니 제사 때 가 뵙지도 못하고 이렇게 저거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형네 집을 가니까 그 부모님들이 형네 집을 안 가고 자기네 집으로 간다고 어서 가자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네가 해 놓은 것부터 먹고 내가 형네 집을 가야 한다고 그러더라는 거죠.

그래서 부모를 모시고 자기네 집으로 오니깐 그냥 그 장독자리에 있던 그 죽 쑤어 놓은 거를 그냥 방으로 들여다가 놓고는 그냥 그렇게 맛있게 잡숫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맛있게 잡숫고선 “야, 난 인제 큰형네 집으로 간다. 잘 살거라.” 이러고선 그렇게 가시더래요. 가시더니 그 해에 농사짓는 부잣집에서 마름을 얻었대요. 마름을 얻어서 농사를 지어서 참, 집을 한 칸 우리게 됐고 인제 제대로 좀 밥을 굶지 않고 살게 됐더랍니다. 그렇게 살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자식들도 가르치게 되고 그렇게 됐거든요.

그게 왜 그렇게 된 줄 아세요? 그 마음이 지극해서요, 마음이. 부모로 보였든 부모 아니로 보였든 간에 마음이 지극하니까 그 모두가 감동한 거죠. 우리가 자기 속으로 생각하는 건 아무도 모르죠. 그러나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고 이렇게 돌아가도 자기가 생각을 했기 때문에 원인이 제공이 되는 겁니다.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전파로 통해서 이렇게 다 알게 돼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종교인들이 모두 제각기 ‘타의에서 구하지 말라. 타의로 이끌어 가지 말라.’ 하는 겁니다. 왜 자꾸 노예를 만드느냐 이 소립니다. 기독교든 불교든 타의에서 구하는 건 다 기복이니까 말입니다. 모두 각자 내가 이 세상에 났으니까 모든 게 벌어진 거고 우주가 있는 거고 세상이 벌어진 거지 내가 없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무효지. 내가 있기 때문에 모든 게, 세상이 벌어진 거고 업보도 유전성도 인과성도 다 벌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부터, 나부터 알아야 하고 나의 주처부터 발견해야 한다 이 소립니다. 먼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 가운데에, 한 찰나에 들고 나는 내 주처가 있습니다. 이 몸뚱이는 그 주인에 의해서 항상 심부름을 해야 하고 부지런히 뛰어야 하는 그런 위치 속에서 자기의 마음을 항상, 즉 말하자면 하심하면서 위로는 자기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아래로는 참회하면서 자기 탓으로 돌리고서 거기다가 맡겨 놓는 거, 이렇게 굴리는 거….

또 여러분이 이 주처에, 주인공에 해 달라고 그래서는 절대 안 됩니다. 해 달라고 ‘잘되게 해 주소서.’ 이렇게 한다면 벌써 둘이 됩니다. 상대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참자기로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거기서만이 할 수 있다.’ 아주 결론적으로 관하는 겁니다. ‘당신만이 나를 이끌어 갈 수 있다. 나는 당신의 종일 뿐이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모든 것이 당신 거고 당신이 하는 거고 당신이 들이고 내고, 병고가 나오는 것도 그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그 속에서 해결을 해야지.’ 하고 모든 것을 관하라 이겁니다. 이렇게 ‘관한다’ 하는 거는 거기다 맡겨 놓고 지켜보고 실험하라, 체험하라 이 소리거든요. 그것이 참선입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엎드러졌을 때 그 땅을 짚고 일어나지 딴 데를 짚고 일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있죠. 그 속에서 나온 건 그 속에서 해결해야 된다. 그래서 그렇게 주인공에다 모든 거를 관하고 또 참회하면서 관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 보시면 사는 대로, 하다못해 부지깽이 하나라도 늘어 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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