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치는 과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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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깨치는 과정을 보면 어떤 분은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서 밝아지는 분이 있고 어떤 분은 어떤 계기로 해서 확 깨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요?
댓글목록
큰스님 말씀
아, 이런 예도 있죠. 예전에도 얘기했지마는 경허 스님도 아주 대 강백으로 유명하게 이름을 날렸던 분입니다. 경전이라는 경전은 무불통지하고요. 그랬는데, 호열자가 돌아다니는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거를 알아도 어쩌지 못했단 얘기입니다. 하룻밤 자고 가자니까, 죽으니까 빨리 달아나라고 그러거든요. 이 집 가도 그러고 저 집 가도 그러고. 그러니까 인심이 고약한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호열자가 돌아다녀서 사람이 전부 쓰러졌더라는 얘깁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살려고 그 고을을 벗어나서, 나무 밑에 앉아서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히더라는 얘기죠. 세상에 자기도 죽을까 봐 뛰어나왔거니와 그 사람네들을 하나도 어쩌지 못했다는 얘기예요. 그러니 여직껏 배우고 여직껏 강의한 게 무슨 소용 있느냐 이래서, 다시 돌아와서 강당을 그냥 문 닫아걸고서 다 해체를 시켰단 얘기죠. 그러고 자기 공부를 시작하고 책을 다 태웠다는 얘깁니다.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이 선에는, 즉 말하자면 견성, 이거는 내면세계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견성을 해 가지고도 거기다 다시 뭉쳐 놓지 않는다면 미해진다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왜 미해지느냐. 흩어지니까. 그걸 갖다가 자기가 견성했다고 온통 자기라고 내세웠을 때 벌써 착이 붙고 욕심이 붙고 아만이 생기고, 삼독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견성을 했어도. 그래서 다시 뭉쳐 놨을 때에 둘이 아닌 도리를 그때 홀연히 알게 되죠. 그래서 견성을 하고 성불을 해야 그다음에 열반경지에 들어서서 자유인이 된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둘이 아니게 나툴 줄 알게끔 됐을 때에 비로소 그 원 하나 탁 놓는 거와 마찬가지다 이겁니다. 봉우라지 하나 탁 올려놓는, 그것이 돈오다 이겁니다. 그것도 그렇게 이름을 해서 돈오지 그걸 어떻게 돈오라고 이름을 붙이겠습니까, 그 경지에.
그러니 이 죽은 세상 즉, 보이지 않는 세상을 접하는 때라 견성을 하고 나면 그 공부를 하기 위해서 그때 대 의정이 생기고 그때에 시공이 초월된 것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 찰나찰나도 거기서 배우게 되고요, 둘이 아닌 도리 배울 때. 그러니까 나 하나의 마음이 수천수만으로, 입자로 인해서 분자가 돼 가지고 화신으로 화해 가지고 이 털구멍으로 들고 나면서 그냥 전부 응신이 돼 주는 그런 보살이 된다 이거죠. 그랬을 때에 그것이 모두가 보살 아닌 게 없고 또 나 아님이 없고, 이 도리가 나오고 그러는 거지, 그 도리를 거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죽은 세상의 죽은 사람도, 보이지 않는 영혼도 보이는 영혼도 또는 생각이 없는 영혼도 생각이 있는 영혼도 모두 그냥 다 건질 수 있는 아주 광대무변한 그런 도리. 부처라는 건 어느 게 부처인지 모르는…, 아니,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까요? 말을 붙일 수가 없어요. 어느 게 찰나찰나 아니 되는 게 없기 때문에, 그리고 내 한마음이 이 우주를 전체 덮고 전체 굴리고 전체 딛고 그러기 때문에, 어떤 걸 어떻게 갈라서 말할 건덕지가 하나도, 말할 아무것도 없다 이겁니다. 이름 붙일 수가 없다 이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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