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 길을 묻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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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본문

질문

스님께서는 나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둘 아닌 도리를 실천을 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둘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만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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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관리자님의 댓글

관리자 작성일

둘이 아닌 실천을 어떻게 해야만 되겠느냐고 물으셨는데요, 모두 내 몸뚱이 네 몸뚱이를 가지고 이렇게 실천이 되게끔, 둘 아니게 실천이 되게끔 된다면 일일이 생각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뿌리가 뭐, 떨어졌다가 붙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 뿌리는 자기 뿌리가 가지고 있죠. 자기가 있는 데에 자기 뿌리가 있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상대방이 나에게 줘도 상대방인 그 사람도 자기 뿌리를 가지고 있고 나도 내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한순간에 그 뿌리와 뿌리가 한데 합쳐 버려요. 합치게 돼 있어요. 이 텔레비전을 끄면 안 나오죠. 켜면 나오죠. 그렇게 자유자재해라 이 소립니다. 우리가 그냥 이렇게 하게 되면 벌써 둘이 아니게끔 된다 이 소리죠.

처음에는 서툴지만 그게 둘이 아님이 되기 때문에 서툴러도 하다 보면 물리가 터지게 되고 자꾸자꾸 늘어나게 되죠. 이렇게 되면 어, 생각 자체 하는 것도 요이하게 되고 생각하는 것도 유유하게, 그냥 자연적으로 그냥 생각이 들고 말입니다. 왜 악한 것도, 부처님께서도 얘기하셨지만 “악한 거나 선한 거나 둘로 보지 마라.” 이랬죠. 그거는 이 모두를 합류화시키는 데 있는 겁니다. “이 몸뚱이도 나 하나로만 보지 마라. 수천 개가 이 몸속에 살아 있다.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자 내 생명들이다. 그러니깐 너 하나만이, 모습을 보고선 너라고 그러지 마라.” 이랬죠.

그랬는데 이게 말로는 할 수가 없는 말이죠. 둘 아닌 도리를 어떻게 실천을 하느냐는 그 얘기는 내가 할 얘기가 아니죠, 사실은. 여러분들이 그대로 마음 놓고 생각 없이 그냥 “아, 이것 좀 먹어 보우.” 이러고 줬는데, 그냥 줬는데도 그냥 둘 아닌 줄 알아라 이거죠. 그걸 생각을 일일이 해서가 아니라. 둘 아닌 줄 알고 이렇게 줬어도 그렇고, 받았어도 둘 아닌 줄 알게 되면 이 받은 것이, 저절로 이 대가가 일로 가요. 가는 줄 모르게 가고 오는 줄 모르게 온단 말입니다.

그래서 인과응보를 모른다면 이 큰 도리를 모른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게 되면…. 이 전 세계에서 지진이 일어난다 하는 것도 우리가 지진이 어떻게 해서 지진이 일어나는 것도 모르고 있죠.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그냥 덮여서 죽고 땅속으로 들어가서 죽고 모두 이렇게 하는 걸 보면, 우리가 개미들도 보고 여러 가지 벌레들도 많이 보죠. 벌레 둥우리가 하나가 터지게 되면, 삽으로 인해 딱 터지게 되면은 그게 그냥 쫙 헤지면서 땅에도 묻히기도 하고, 그냥 모두 다리도 끊어지고 목도 끊어지고, 다 죽게 되고 사는 놈은 살고 이렇게 되죠. 이런 거 보는 거나 우리가 지금 그게 지진이 일어나서 그렇게 죽는 거나 뭐가 다릅니까. 다르지 않죠.

그래서 차원에 따라서 연쇄적으로 내려가는 거죠. 오계를 받을 때 얘기했죠. 남의 생명도 내 생명과 같이 생각하라. 또는 내 물건과 같이 생각하라. 내 아픔같이 생각하라. 이렇게 모두 말입니다. 그래서 그 벌레들 그렇게 죽는 문제들. 허청없이 그냥 밭에 가다가도 그저 이런 벌레들이 모두 꾸역꾸역 나오면은 아무 생각 없이 탁 쳐서 그냥 벌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산산이 헤어지고 죽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 문제가 자기 문제로 돼 버려요.

그게 고통이라고 그러는데 네가 한 거는 네가 그것을 해결해야죠. 자기가 해결해야 그게 맞죠. 그렇기 때문에 거기까지 간다면 자기가 고통을 받을 때 그 모든 생명들이 그렇게 귀하다는 거를 생각하게 된다 이겁니다. 그래서 고를 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거는 자기가 진화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진화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생산이 되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찾고, 살아 있으면서도 길을 걸림 없이 걷게 될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한다.

물론 우리가 지금 모두를 잘해야 되죠. 스님네들은 염불도 잘해야 되고 뭐, 모든 거를 잘해야 되겠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마음들이 이거를 잘했다 하면은 한 가지는 이렇게 빼놓고 이거 해요. 빼놓고 하는 게 아니죠. 닥치는 대로 잘해야 되겠죠. 어떤 거든지. 어떤 거를 막론하고 다 잘할 때에, 때에 따라서 길을 걷다가도 그런 일이 생기거든요. 그런 일이 생기면은 자기가 항상 그냥 무심코 하던 거기 때문에 그냥 하게 되죠. 그냥 생각하게 되고요. 그냥 자기 하나의 생각뿐이 아니라 포괄적인 생각으로서 그냥 하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뭇 중생을 건질 수 있다 이런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지진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도 이런 공부를 해서 포괄적인 생각으로서 둘 아니게 생각한다면 모든 거를 다 건진다. 죽여도 건지는 거고 살려도 건지는 거다. 이게 사람이 한 철 살다가 그냥 끝나면 그게 아닌데요, 한 철 살다 끝나는 게 아니라 내내 이게 끝이 없이 돌아가는 거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이거를, 죽었어도 그냥 건진다. 그리고 또 포괄적으로 생각을 잘할 때에 어떤 때는 종자가 덜 생기게 하는 이유도 있는 거죠. 우리가 집은 조그만 데다가 식구는 너무 많이 이렇게 하게 되면은 그 집이 터질 거 같으니까 종자를 다섯, 하나 하나 치면 열 개 스무 개를 낳아야 될 텐데 그냥 하나로 묶어서 낳는다, 이런 것도 되고요, 이런 것도 실천입니다, 이게. 모두가 실천이에요.

옛날에도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계셨죠. 인제 공부하는 분들이,  선방에 계신 분들이 인제 바람을 쐬러 나갔는데 한 분이 이렇게 가다가 말곤 그냥 뚱그렇게 그냥 금을 그어 놓고선 “너희들, 여기 못 들어오면 정각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러거든요. 그러니깐 전부들 글로 들어갈 수밖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있다간 아무 소리 없이 발로 그 그린 거를 다 지워 버리고 하는 소리가 “여기 들어가면 매여서 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또 그러거든요. 그랬는데 그거를 어떻게 해야만 옳습니까? 이쪽에도 글로 들어와야 정각을 한다 하고, 이쪽에는 그것에 매이면 정각을 못한다 하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 그거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틀리든지 옳든지 그냥 해 보세요. 허허허. 틀려도 별로 틀리지 않을 텐데. 이거를 그 당시에도 그렇게 놓고선 아무리 일러 달래도 일러 주질 않았어요. 본인들이 그건 알아야 하느니라 하고.

그래서 둘 아닌 도리를 이렇게 여러분들한테 가르치고 그러면은, 이것이 얼토당토않은 말이라도 여기 와서 닿지 않는 말이 있고 여기 와서 닿는 말이 있죠. 만날 그냥 그 한 도리에서 자꾸 돌아가는 거니까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법이냐?” 하고 물으니 아주 뭐 신나게 그냥 “이 세상은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갑니다.” 하니깐 “그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 있느냐?” 이러고 물으니 대답을 거기서 못했더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것도 역시 마찬가지고,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게 모를 때는 아주 그게…. 그래서 지혜로워야 된다. 지혜롭게 돼야 눈도 뜨고 귀도 뜬다. 이런 거죠. 우리가 ‘둘’ 해도 하나고 ‘하나’ 해도 둘입니다. 하나 하면 둘이 있는 거고 둘이 있는 거면 하나가 있는 거죠. 그러니깐 세상은 다 비었습니다. 하나도 없다는 걸 알면은,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세상도 없고 모두가 없다면 얼마나 편리하고 좋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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