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세계로 넘어가려면
본문
질문
현대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서 물질을 쪼개 보는 기술도 자꾸 높아져서 이제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단계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쪼개고 쪼개다 보니까 질량이 이제 거의 없고 수명이 지극히 짧은 입자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 인간은 유(有)의 세계의 궁극에 이르러 무(無)의 세계를 넘어가는 문을 발견할 수 있게 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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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그래서 우리가 지금 한마음의 공부를 이렇게 하고 가는 거죠. 지금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서부터, 그분만 깨달아서 한 게 아니라 단군할아버지도 그 사는 법을 가르쳤고, 또 사대 성인들이 다 가르쳤어요, 부처님만 가르친 게 아니라.
그래서 그 문은 아주 간단해요. 지금 내가 말하듯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 교차로에 있으니까.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거와 같은 그 교차로에 죽음과 삶이 있다.’ 이러듯이, 우리 지금 세상이 이게 물질세계로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문화 문명이 아주 고도로 발전이 됐지만, 지금은 거꾸로 다시 돌아와서 다시 그 교차로를 넘어서야 된다, 정신세계로. 그것은 우리가 지금 마음공부 하는 데 있어서 그 교차로를 넘어서야 하는 것과 같죠. 그것도 들이고 내는 그 교차로, 거기 한마음에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마음에서 물질세계로 지금 팽창될 수 있다면, 정신세계로 진화돼서 우리가 발전할 수 있다면 정말이지 우리가 한마당 한식구가 되죠. 세계평화가 온다 이 소립니다. 그러한 것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아, 여기 여러분이 공부하고 계신데 뭐 걱정입니까, 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내고도 못 믿죠? 여러분이 한번 마음을 내서 지켜보라고요, 어떤가? 의심하지 말아요. 지금 물어보듯이, ‘내가 이 공부를 하면 성사가 될까, 안 될까?’ ‘그것이 진짜 그렇게 될까, 안 될까?’ 이런다면 되겠소? 네? 내가 목말라서 죽겠는데 물을 들고, ‘이 물을 먹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런다면 그 목마른 게 다 없어지오? 물을 먹을 수 있겠소? 그러니까 목마를 땐 그냥 무조건 먹는 것이 장땡이에요. 그리고 물이 먹기 싫을 때는 안 먹고 놓는 게 또 장땡이거든. 그러니까 어줍게 내가 조금 알아 가지고는 그냥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금 이런 시기에는 이것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고 막 생각 내지 말고, 모든 걸 다 맡겨서 아무 생각이 없을 때에 한생각을 내라 이겁니다.
모든 것을 망상이라고 끊어야 한다고 할 게 아니죠. 생각나고 생각나고 생각나고 생각나는 것은 망상이 아니라, 그것은 순리적으로 공해서 돌아가는…. 그렇죠? 우리가 지금 순리적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겠소. 이 생각 하고 저 생각 하고 또 딴 생각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자꾸 자꾸자꾸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게 망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돌아가니까 ‘내 몸, 나온 거 들어간 거, 사는 거, 보고 듣는 거, 몽땅 그놈이 하는 거다.’ 하고 맡기세요. 그놈이 하는 거지 딴 놈이 하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그놈, 자기 주인공한테다 모든 것을 맡기세요. 주인공 죽는 법은 없습니다. 맡겨 놓고 그놈이 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여러분이 방황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지금 금방 죽는대도 방황할 게 없어요. 그게 바로 힘이에요. 그러니까 조금 늘려 놓으려면 늘려 놓고 줄이려면 줄이지, 뭐 걱정이냐 이겁니다.
이 무심 도리(無心道理)가 지금 시쳇말로 정신세계의 한마당에, 그 한자리에, 그 만봉(萬峰)에, 만봉! 만봉 봉(峰)에 연꽃이 피어서 이 세상을 두루 할 수 있는 바로 그런 멋진 도리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 한마당이 있는데 왜, 왜 그걸 마음대로 못해? 안 그런감요? 왜 그걸 마음대로 못해요? 허이, 참 내. 올려놓는 것도 법, 내려놓는 것도 법인데, 자유스럽게 삽시다, 자유스럽게. 이 자유스럽게 사는 방법을 배우려면 마음공부밖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말없이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거고, 보지 않고 보는 능력을 배우는 거며, 듣지 않고 듣는 방법을 배우는 거며,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방법을 배우는 거며, 지금 결정적인 문제를 결정하지 않으면서도 결정할 수 있는 그 능력을 배우는 공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말을 너무 남용하면, 예를 들어서 말을 함이 없이 해야지 내가 그 도리도 모르고선, 함이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설법을 했지.’ ‘내가 이런 말을 이렇게 했지.’ 하는, ‘내가 했지.’ 하는 그 마음만 들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남용하는 거라고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미(迷)해지는 그런 마음이 될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함이 없이 해야죠. 그 말이 안 나오고 하는 것은 아직 배추 무만 사다 놨지, 양념을 해서 맛있게 버무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아서 그래요. 댁이 지금 사다 놓은 무, 배추에다가 양념을 버무려서 요리를 만드는 방법을 지금 수련해야 되거든. 그러니까 그러한 이유로 그런 거라고요.
그래서 나를 깨달아 가지고도 무의 세계에서의 둘이 아닌 방법을 알기 위해서 또 놓고 공부한 거예요. 육조 스님도 그렇고, 다. 또 놓고 공부해 가지고 자꾸자꾸 보임(保任)을 해서 들어가죠. 그렇게 해 가지고 나중에는 부처님처럼 야, 요만한 것에는 나도 요만하게 응해서 한마음이 되어 주고, 또 조만하면 조만한 대로 한마음이 되어 응해 주고, 이렇게 할 수 있는, 바로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면서 내가 돼 줄 수 있게 되죠. 크나 작으나 다 내가 돼 줄 수 있고 한마음이 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살아서 열반이 아니라면 죽는 것이 열반이 아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살아서 죽어야 열반이죠. 허허허. 옛날에 어떤 큰스님이 말씀하셨듯이 “3년을 눈 뜨고 푹 쉬면 된다. 그러면 둘이 아닌, 차차 열반경지로 그냥 곧장 들어가는 길이 나오느니라.”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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