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대로 살면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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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아직은 절에 나가지 않고 있지만 나름대로 불교에 큰 관심을 갖고 있고 대행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마음요전을 두 번째 읽고 있는데 최근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는 것과 본능대로 하는 것과는 무엇이 다른지요. 마음공부를 하지 않는 새나 구더기 같은 동물들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본다면, 자신과 타자를 분리하여 인식하기 시작한 때로부터의 인간보다는 아주 어린 영아나 유아 그리고 새나 구더기 같은 존재가 더 주인공에 맡기고 사는 것은 아닌지요. 가르침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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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 말씀
그래서 이런 말을 하지요. 우리의 인생은 마치 녹음테이프에 저장시켜서 입력된 내용이 흘러나오듯이 그렇게 산다고요. 그래서 팔자가 있고 운명이 있고 고가 있다고요. 그러나 이 마음공부를 한다는 것은 몰랐을 때 살아온 내용이 입력된 테이프에 다시 새로운 녹음을 함으로써 전자의 입력된 내용을 바꿔 나가는 공부라고 항상 말을 해 왔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차이점이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인생에서 크게 본다면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것은 오산입니다. 오히려 어린아이 속에 허옇게 늙은 노인이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진리에는 늙고 젊고가 본래 없습니다. 이런 얘기를 언젠가 했었죠. 어느 아이가 불집게를 가지고 놀다가 같이 놀던 아이 정수리를 찔러서 죽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죽이려고 해서 죽인 게 아니거든요. 불집게를 가지고 놀다가 어떻게 잘못해서 죽인 거지.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전자에, 죽은 애가 찌른 애를 그렇게 죽였던 겁니다. 썰매 꼬챙이로요. 그러니까 이게 피장파장이 된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그 인연의 과보를 모르고 죽은 아이 집에서 보상을 해라 뭘 해라 한다면 도루묵이 돼 버리죠. 또 원수가 된다는 말입니다. 살생의 문제를 넘어서 인과성으로 또 엮어지는 거죠. 업보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체를 주인공에 놓는 이 공부는 나를, 자아 완성을 위해서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죠. 이것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내 안의 수없이 많은 의식들 속에 입력되어 있는 모든 일들을 근본에 되놓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지 않고 그냥 무사태평으로 살아가다가는 정말로 눈물 흘릴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마음공부는 알음알이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쉽게 건성으로 믿고 놓고 맡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자기 뿌리를 믿지 못해서, 맡겨 놨다가도 되끄집어 내고, 또 맡겼다고 하면서 되끄집어 내고 그러는데 그게 아닙니다. 진짜로 믿는 사람은 한번 맡겼으면 맡긴 그 자체가 아주 뚜렷하게 정립이 됩니다. 그러니까 의심도 없고 근심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좀 시일이 지나서 풀릴 수도 있고 단박 풀릴 수도 있는, 그런 천차만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지 못하니까 조급하게, ‘어이구, 이렇게 맡겨도 안 되는구나.’ 하면서 안달을 하는 거죠. 그렇게 자신을 못 믿으면 이 세상의 무엇을 믿겠습니까? 태어난 자체가 증거입니다. 뿌리로 인해서 싹이 났는데도, 자기 뿌리가 자기를 형성시켰는데도 그렇게 못 믿어서야 어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공부를 해 왔던 분들만이 진정으로 이 도리를 알게 된 고마움을 알고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러니 사량으로 생각을 짓지 말고 정말 지극하게 믿고 들어가세요. 공부를 하다 보면 주인공에 맡기는 것과 본능대로 사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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